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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는 두 시선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는 두 시선
  • 공진성
  • 승인 2023.02.10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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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착각』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8쪽+『제3차 세계대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에마뉘엘 토드 지음 | 김종완·김화영 옮김 | 피플·사이언스 | 192쪽

 

‘동양적 전제’ 혐오와 ‘서양적 위선’ 비난

화해 어려운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이 전쟁은 유엔 사무총장조차 전날까지 그 발발 가능성을 믿지 않았을 정도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오늘날 지구상의 정상 국가라면 전쟁을 통해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분명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예상과 기대를 뒤엎고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차량이 불타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언론은 전문가를 찾아 원인과 전망에 대한 의견을 듣고 정리해 이를 대중에게 알린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전쟁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전문가일 것이다. 전문가는 현안을 포괄하는 더 큰 사안을 학문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깊이 있게 다뤄본 경험이 있어서 현안에 대해서도 유용한 해석의 틀을 제공할 수 있다. 

모든 관찰은 이론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이론이 다양해지면 관찰도 다양해진다.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할 때 우리는 조금 더 종합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난 70여 년 동안 형성된 대한민국의 주류 언론과 학계, 전문가의 시각은 어쩔 수 없이 친서방적이고 친미국적이다. 

다행히 지난 몇 십 년 동안 대안적 시각을 제시할 언론과 전문가 집단이 생겨났다. 번역서도 그만큼 다양해졌다. 러시아를 잘 이해하는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다른 시각 덕분에 이 전쟁을 우리는 과거와 조금 다르게 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그런 ‘이해’가 무비판적 ‘옹호’는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그런 나의 의심이 내가 여전히 서방의 시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특수한 입장과 보편적 입장을 구분하려는 지성의 노력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30여 년 전 북한을 내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송두율 전 뮌스티대 교수의 주장이 북한을 옹호하는 주장으로 여겨졌듯이, 여전히 러시아의 행위 동기를 내재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목숨이 오가는 전쟁 상황에서 피아 식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한가한 소리로 여겨진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각각 한국과 일본에서 출간된 두 권의 책이 있다. 철학자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현대철학)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착각』과 프랑스의 역사학자 에마뉘엘 토드 프랑스 파리 국립인구학연구소(INED)의 연구원의 『제3차 세계대전은 이미 시작되었다』이다. 토드는 모국 프랑스가 “냉정한 토론을 허락하지 않는” 상황이어서 언론의 취재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일본 언론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진행 중인 전쟁을 다루는 책이 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출간되었다는 것은 한 편으로는 저자들이 애초부터 전쟁을 해석할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책이 사안 자체에 대한 구체적 분석보다는 다소 추상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쟁의 초기에 사건에 대한 현상적 보도가 쏟아지고, 곧이어 이미 준비된 전문가들의 다분히 선험적 성격을 띤 거시적 해석이 제시된다면, 사건이 마무리될 무렵에야 비로소, 헤겔의 말처럼, 사건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 제시될 수 있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준비된 해석 틀을 순발력 있게 제시한 것이었듯이, 이진우의 ‘유라시아주의’와 토드의 ‘인류학적 균열’도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는 아주 오래된 두 개의 대립적 담론, 즉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발견한다. 

흥미로운 것은 아시아에 속한 한국에서 ‘오리엔트’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한 시각이 제시되고, 유럽에 속한 프랑스에서 ‘옥시덴트’에 대한 마찬가지의 시각이 제시된다는 것이다. 이진우가 오래된 오리엔탈리즘을 상기시키며 러시아와 중국의 유라시아주의와 전제적 지배를 비판한다면, 그런 시각을 토드는 자신의 인류학적 해석을 통해 상대화하면서 오히려 서구의 이른바 보편적 ‘자유민주주의’라는 착각을 비판한다. 그것이 특수한 가족구조에서 비롯한 것이어서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현실태가 기껏해야 ‘신자유주의’ 또는 ‘자유주의적 과두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에 맞서 다시 이진우는 과연 어떤 사회와 국가에서 살고 싶은지를 독자에게 물으며 실존적 결단을 촉구한다. 이 두 권의 책은 모두 우크라이나 전쟁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분단된 한반도에서 남한이나 북한에 대해 우리가 어떤 시각과 입장을 취할 것인지를 묻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독자들은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구체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는 상이한 두 가지 시각을 접할 수 있을 것이고, 추상적으로는 지난 2500년의 세월 동안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온 ‘동양적 전제’에 대한 혐오와 ‘서양적 위선’에 대한 비난의 화해하기 어려운 대립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대립이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높이 날아오르기 위해서도, 그리고 인류가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도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일지 모르겠다. 

 

 

 

공진성 
조선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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