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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너도나도 의대나 법대를 가려고 할까
왜 너도나도 의대나 법대를 가려고 할까
  • 정태연
  • 승인 2023.02.09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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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에서 심리학을 외치다_ 세 번째 주제 ‘학교정글’③ 교육의 두 가지 목적

‘내 삶의 심리학 마인드’와 <교수신문>이 함께 ‘세상의 중심에서 심리학을 외치다’ 공동 기획을 마련했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를 다양한 관점으로 들여다보는 주제탐구 방식의 새로운 기획이다. 한 주제를 놓고, 심리학 전공 분야의 마음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과 분석을 통해 독자의 깊이 있고 입체적인 이해를 돕는다. 마음 전문가들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은 길을 잃은 현대인에게 길잡이가 될 것이다. 몸과 MBTI에 이어 세 번째 주제로 ‘학교정글’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시각을 4회에 걸쳐 싣는다. 정태연 중앙대 교수(심리학과)의 세 번째 글이다.  

우리 사회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목적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필자가 생각하는 대답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민주시민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덕성을 키우는 것이다. 여기에는 도덕이나 윤리, 공동체 의식, 배려, 협동과 같은 덕목이 있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개인의 잠재력과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함양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학생들이 자기 적성과 흥미, 목표를 파악하고 거기에 부합하는 진로를 선택해서 추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학교의 모습은 이 두 목적을 균형 있게 실현하는 것이다. 오직 사회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학교도 문제이거니와, 개인의 목표만 실현하기 위해 사회에 필요한 덕목을 소홀히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면 우리 사회의 학교는 어떠한 모습일까? 우리의 학교는 이 두 목적이 균형을 이루기보다는 후자의 경우 즉, 사회보다는 개인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좀 더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 간의 폭력이나 따돌림도 그렇고 학생과 학부모가 교사를 함부로 대하는 경우를 볼 때, 우리 학교에 도덕과 공동체 의식, 배려와 존중의 덕성이 살아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사회적 서열을 높이기 위한 학교

학생들이 교사를 무시하고 심지어 폭행하는 이유는 그들이 성적, 좀 더 구체적으로는 대학 진학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적을 올리는 데 학원만 한 곳이 어디 있으랴. 사실은 교사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학교에서 도덕과 윤리,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희생의 정신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가르치고 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사를 거의 보지 못했다.

학부모의 발상도 마찬가지이다. 가해 학생의 학부모는 사과보다는 자기 아이를 감싸는 데 급급하고, 권력이나 재력깨나 있는 학부모는 한술 더 떠서 교사를 폭행하고 학교에서 횡포를 부리기도 한다.

이런 행동의 이면에는 성적, 돈, 권력과 지위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우리 사회는 이 기준으로 사람들을 줄 세우고 그 서열에 따라 평가한다. 여기에는 협동이나 배려, 공동체와 같은 덕목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면서 돈과 권력을 가장 잘 성취할 방법이 대학 진학으로 치면 의대와 법대에 가는 것이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공부깨나 하면 너도나도 의대나 법대를 가려고 할까? 적성이 맞아서 그렇다면, 공부 잘하는 학생은 모두 의대나 법대에 맞는 적성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병들고 억울한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진학하는 것도 우리의 현실을 보면 사실이 아니다. 

서열을 위한 경쟁의 결과는 무엇일까?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전쟁의 결과 (Consequences of War)’(1638-39), 캔버스에 유채.

서열을 위한 경쟁에서 싹트는 불행

이처럼 획일적이고 경쟁적이며 자기중심적인 학교 문화는 그 구성원들을 힘들고 불행하게 만든다. 학교가 개인의 영달만을 위해서 존재할 때, 그러면서 경쟁에 기반해서 성적이라는 획일적인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할 때, 이런 시스템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기 어렵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이 지적 능력에서 다 같을 수는 없다. 누군가는 다른 측면에서 뛰어날 수 있는데, 우리 학교의 획일적이고 서열적인 평가 기준은 오직 하나, 성적뿐이다. 그러니 이 기준에 부합하는 극소수만 자신에게 만족하고, 나머지 대다수는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보기 십상이다.

또한 이러한 학교 문화는 서로를 경쟁자로 만들기 때문에, 함께 사는 데 필요한 덕목, 가령 협력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경쟁이 심한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를 첫 번째 경쟁자로 꼽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학교에서 학생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나 유용한 자료를 친구와 공유하기 어렵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를 만들기가 어렵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고 다른 사람, 특히 가깝고 친한 친구가 있어야 살 수 있는 존재이다. 이때 그 친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 중 누구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동료들을 모두 경쟁자로 보고 있으니, 어디 가서 친구를 만들고 어렵고 힘들 때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을 사귈 수 있겠는가.

학교에서는 더불어 사는 삶이 가능한 민주 시민을 육성하는 목적을 버려서는 안 된다. 사진=펙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게 교육?

돈과 권력으로 수렴하는 우리 학교의 성취지상주의는 학생들에게 또 다른 아픔을 가져다준다. 즉, 그것은 우리 학생들의 삶에는 현재가 없고 오직 미래만 있다는 것이다. 현재를 계속해서 희생하면서 미래만을 바라보고 사는 그 삶이 오늘날에는 대학에 들어와서도 끝나지 않는다.

취업을 위해서 대학 생활을 원하는 방식대로 하기 어렵고, 취업하고 나서는 그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또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끝없이 치열한 경쟁과 함께하는 삶을 피할 수가 없다. 아주 어릴 때부터 수십 년을 미래를 위해서 사는 삶을 우리 학생들은 살아가고 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하면 내일도 행복할 수 없다는 이 단순한 사실이 우리 학생들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더불어 사는 삶을 교육하는 학교를 꿈꾼다

인생은 길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삶의 길이는 과거에 비해 아주 많이 길어졌다. 그 길을 즐겁고 행복하게 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잘 살 필요가 있다. 자기만을 위한 획일적인 기준으로 좀 뛰어나다고 해서, 그 우월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오직 경쟁만을 배워서 성인이 되고 직장인이 된다고 해도, 함께 사는 데 필요한 덕목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덕목은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든다고 해서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우리 학교가 이러한 덕목도 함께 키우는 기능을 할 때, 우리 학생들은 좀 더 건강하고 밝게 성장할 것이다.

정태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

사회심리학의 주제 중 대인관계에 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하고, 현재 중앙대 심리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사회 및 문화심리학에 대한 공부를 기초로, 한국인의 성인발달과 대인관계, 한국의 사회문제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심리학적 지식을 군대와 같은 다양한 조직에 적용하는 일에도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는 『사회심리학』(2016), 『심리학, 군대 가다』(2016), 『대인관계와 의사소통의 심리학』(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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