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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人面文으로 多産 상징…日, 묘사에 충실
中, 人面文으로 多産 상징…日, 묘사에 충실
  • 이한상 동양대
  • 승인 2006.07.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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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최고예술품을 찾아서 (11) 中·日 토기와의 비교

최근 중국 고고학의 가장 큰 성과는 전설의 시대로 불리던 ‘삼황오제시대’를 증명해낸 것으로, 기원전 2천년기의 청동기문화가 서서히 베일을 벗고 있다. 이후 하상주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까지 절정기의 금속문화·도자문화가 꽃피운다. 자연히 토기는 더 이상 예술혼 구현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실용그릇의 지위에 머물게 됐다. 때문에 가장 중국적인 토기문화는 청동기문화 출현 직전 단계인 신석기시대 후기인 앙소문화기의 채문토기에서 찾아진다.

▲‘인면어문채도반’, 입지름 50cm, 기원전 5천년경, 중국 서안시 半坡遺蹟 출토, 중국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 ©

우리의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이 토기는 무늬를 새기지 않고 그릇 표면에 그린 것이다. 붉은 안료를 바른 다음 흰색, 검은색, 갈색, 노란색 등의 안료를 써 각종 기하학적인 무늬나 물고기, 사람의 얼굴 등을 그려 넣었다. 그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토기는 서안 반파유적에서 출토된 人面魚紋彩陶盤이다. 토기 내부에 사람얼굴과 물고기를 그렸다해 붙여진 이름이다. 사람얼굴은 머리와 턱을 검게 칠했고 선으로 표현한 눈과 코에서 어딘지 모를 기묘한 이미지가 풍겨난다. 물고기는 뭉툭한 머리에 눈이 둥글고, 꼬리 쪽으로 가면서 급격히 가늘어진다. 중국학계에서는 사람얼굴그림은 어머니의 몸에서 막 태어난 아이로, 물고기는 몸속에 수많은 알을 품고 있다 해 다산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즉, 당시 사회는 모계씨족사회였고 다산은 곧 그 사회의 안정적 유지를 위한 가장 원하는 소망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신석기시대 이래 한반도 토기문화의 영향을 다대히 받았다. 구주지역 등 한반도와 가까운 곳에선 우리의 빗살무늬토기와 흡사한 토기가 다량 출토되고, 그런 양상은 고분시대까지 이어진다. 당나라 문화가 동아시아 전체에 파급되기 전, 즉 고분시대가 일본적인 특색이 가장 현저한 시대로 보고 있는데, 당시 유행한 토기는 스에키(須惠器)로 불리는 단단한 토기다. 그런데 이 토기는 가야와 백제의 장인들의 손을 빌려 탄생한 것임이 밝혀져 이를 일본적인 것으로 보기 어렵다. 대신 고분주변에서 출토되는 ‘하니와(埴輪)’는 적갈색 연질의 토제품이며 인물의 표현이나 정면기법 등에서 일본적인 특색이 매우 현저하다.

▲‘인물하니와’, 높이 156cm, 6세기 후반, 일본 群馬縣 觀音山古墳 출토, 일본 군마현립역사박물관. ©

가장 대표적인 하니와는 군마현 관음산고분 출토 인물상이다. 이 무덤은 백제 무령왕릉 출토 청동거울과 같은 틀에서 부어 만든 거울이 출토돼 유명하다. 여기서 출토된 하니와는 여러 점인데 무덤 주인공이 사망하자 그의 권위를 후계자가 계승하는 의식이 담겨 있다고 한다. 금령총 출토 기마인물형 주자와 마찬가지로 이 하니와는 일본고분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복식이나 얼굴모습이 세밀히 표현돼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인물은 八字모양 모자를 쓰고 두툼한 갑옷을 입었는데 하체의 표현이 조금 과장됐다. 얼굴표현은 중요한 의식 수행중이어서 그런지 긴장감이 흐르고 귀에는 큼지막한 귀걸이를 매달았다. 받침이 좁기 때문인지 어딘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지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일본 전국시대 사무라이의 이미지와 상통한다.   / 이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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