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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미·소의 팽창욕…제3세계 냉전사도 비어있다
‘만들어진’ 미·소의 팽창욕…제3세계 냉전사도 비어있다
  • 우동현
  • 승인 2023.02.16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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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시대, 우리에게 ‘냉전’은 무엇이었나① 지구적 관점에서 본 냉전사

냉전사 연구에서 각 진영의 진열장을 자처한 한국과 북한에 대한 서술과 
1970년대 다극체제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냉전의 지구사’의 재구성이 연구자들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오드 베스타의 2005년도 저작 『냉전의 지구사』(The Global Cold War)는 21세기 서구 학계가 생산한 가장 영향력 있는 냉전사 연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어떠한 맥락 속에서 그러한 위상을 갖게 되었을까?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냉전의 두 축 미국과 소련은 서로의 국가기밀을 알아내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했다. 물론 그러한 역사는 철저히 기밀로 분류돼 우리가 이에 관해 알고 있는 바는 거의 없다. 동시에 등장한 것이 바로 적에 대한 정보 만들기였다. 

The Global Cold War (2005)의 표지(왼쪽)와 『냉전의 지구사』(2020)의 표지.

소련은 서유럽을 적화통일하려고 했을까?

미국과 같은 냉전안보국가(Cold War security state)는 관·군·학이 연계해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가공·형성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보는 강력한 생성적 측면을 지녔다. 예컨대, 소련은 서유럽을 적화통일하려고 했을까? 여태껏 발견된 문서고 자료는 이 질문이 성립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렇게 ‘상상된’ 소련의 팽창욕은 자유주의 세계를 두려움으로 단합시키는 구심점이었다. 워싱턴·런던·파리의 경세가들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에 두고 국정을 운영했다. 

이러한 ‘냉전적’ 정보를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소련·러시아의 팽창욕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비쳐진다. 하지만 문서고 자료에 기초한 연구는 서구 세력의 동진(東進)에 대한 소련의 두려움을 미국 외교관들이 어떻게 적극 활용하고 기만했는지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역사가 데이비드 앵거맨은 미국 내 소련학(Soviet Studies)의 성쇠를 통해 냉전기 미국의 학지(學知) 동원의 역사를 들려준다. 소련학은 국가에 적에 대한 ‘만들어진’ 정보를 공급했고, 국가는 이러한 연구 활동을 지원했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가 발사된 이듬해인 1958년, 미국은 국방교육법을 제정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지원, 자국의 과학기술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다.

1960년대 후반 정부 지원이 감소하자 자본주의 질서의 수호자인 카네기, 록펠러, 포드 등 민간 재단들이 나섰다. 냉전의 대표적인 산물인 미국의 슬라브학은 현재까지 그 권위를 유지하고 있다. 한편, 역사가 세르게이 죽의 연구는 소련 내 미국학(amerikanistika)의 역사를 통해 소련에서도 미국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음을 보인다.

문서고 혁명, 냉전사연구 패러다임을 바꿨지만

1990년대 초의 문서고 혁명은 ‘만들어진’ 정보 바탕의 냉전사 연구 패러다임을 뒤흔들었다. 학자들은 포스트사회주의 국가들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과거 기밀로 분류된 데이터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냉전적’ 냉전사 서사의 오류가 드러났고, 특히 사회주의권 세계의 알려지지 않은 면모가 대거 공개됐다.

Brothers in Arms (1998)의 표지

당시 베스타는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오가며 문서고 혁명에 동참하면서 서구·중국 역사학자들의 가교 역할을 했다. 중국현대사를 전공으로 하는 냉전사가 베스타는 문서고 자료 구사에 정평이 난 학자였다. 그는 학술적 권위를 인정받아 미국의 저명한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Woodrow Wilson Center)가 주관하는 냉전국제사 프로젝트 시리즈의 첫 번째 저서 『전우들』(Brothers in Arms)을 책임지고 편집했다.

『냉전의 지구사』는 베스타에게 탁월한 냉전사가라는 영예를 부여했다. 책은 2005년 출간 직후 냉전사 연구의 필독서로 거듭났다. 이 책의 학술적 파급력은 2020년, 국역본 출간 이후 나온 여러 편의 서평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역사가 노경덕에 따르면, 이 책의 덕목은 크게 네 가지다. ①냉전사 연구의 영역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했고, ②강대국과 제3세계 사이의 양방향적 교환을 포착했으며, ③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발전(development)과 통제로 재규정했고, ④냉전사의 복잡성을 재구성했다. 이런 독창적인 시도를 통해 베스타는 냉전의 ‘책임’ 소재에 집착하는 기존의 논의 구도와 반공 또는 반미라는 단순한 ‘냉전적’ 정서를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한국·북한·중국 포함하는 ‘냉전의 지구사’ 재구성하기

모든 연구서가 그렇듯, 이 책에도 아쉬움은 있다. 특히 ‘미·소 대결’이라는 서사를 극복하기 위해 ‘제3세계’에 주목하는 전략은 도리어 미·소의 지구적 경합(contest)을 구조적으로 부각시키는 결과를 부른다. 하여 이 책은 제3세계가 치른 냉전사를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 제3세계 구성국의 내부적 상황은 거의 볼 수 없다.

냉전기, 각 진영의 진열장(showcase)을 자처한 한국과 북한에 대한 서술, 그리고 1970년대 다극체제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냉전의 지구사’의 재구성이 필자를 포함한 냉전사 연구자들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제국과 의로운 민족』(2022)의 표지

한국을 중심에 놓되 동시에 탈중심화(decenter)하는, 일견 불가능에 가까운 ‘지구적 관점에서 본 냉전(한국)사’ 연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는 베스타의 대표 역자이자 냉전기 한국의 외교사를 새롭게 탐구하고 있는 옥창준 박사의 학술이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2022년 8월, 서울대 대학원에서 「냉전 초기 한국 국제정치 지식의 재구성」으로 외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신진 연구자이다. 다음 연재에서는 옥창준 박사가 분석하는 『냉전의 지구사』에 대한 중요하면서도 흥미로운 지적을 다룬다.

우동현 객원기자 / 광주과학기술원 위촉연구원

UCLA에서 과학기술사(북한-소련 관계사)로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The Historical Journal』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이 게재됐다. 역서로는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 『플루토피아』, 『저주받은 원자』, 국제공산주의운동을 2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풀어낸 『전쟁의 유령』(가제)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총서 36권 및 38-39권을 공역했다. 주요 관심사는 냉전사, 핵역사, 기술환경사, 디지털역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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