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23:25 (목)
우크라이나 침략전쟁, 자유주의 방관과 무관치 않다
우크라이나 침략전쟁, 자유주의 방관과 무관치 않다
  • 최승우
  • 승인 2023.02.15 08: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네이버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㊱
고세훈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명예교수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9를 맞이해 「자유와 이성」을 주제로 총 44회 강연을 시작했다.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본성, 재난과 질병에 대한 제약과 해방 등을 역사, 정치, 철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살펴본다. 지난 14일 고세훈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명예교수가 「경제 발전과 자유주의의 문제」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36강은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의 「능력주의, 사회적 아노미, 개인의 자유」, 제37강은 정과리 연세대 교수(국어국문학과)의 「한국 문학 속의 자유와 자유주의」, 제38강은 원용진 서강대 교수(커뮤니케이션학부)의 「한국 대중문화 속의 개인과 자유」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테일러는 정치적 해법 곧 민주적 의지, 합의, 다수 형성을 통한 해결을 강조함으로서 민주주의의 논리와 전망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종전 이후 좌우 계급적 타협이 일궈낸 합의정치의 배경에는 물론 번영의 사반세기라는 유례없는 경제 성장시기가 있었다. ‘복지 국가 위기론’은, 성장의 침체로 인한 계급 갈등의 심화와 현실 사회주의 붕괴라는 국내외적 조건이 맞물리면서, 기왕에 금융 시장의 지구적 개방을 주도해 오던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공세를 강화하는 가운데, 왕성히 거론됐다. 

“역사의 종언”이 선언되고 “대안은 없다”류의 슬로건이 난무하며 복지 국가적 합의를 대체해 새로운 자유주의적 합의가 들어섰으니, 후자 또한 지속적 경제 성장의 전망 혹은 약속을 설득하는 세계화 담론과 함께 대세를 장악해갔다.

여기서는 통상적 인식에 따라 경제 발전의 주 내용으로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발전을 성장의 문제로 파악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한계를 역량을 중시하는 적극적 자유의 관점에서 살핀다. 이런 논의가 자유에 대한 규범적 입장들 간의 예상되는 공방으로 기우는 것을 가능하면 비껴가기 위해, 특히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조야한 소극적 자유주의에 집중함으로써 허수아비를 때린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 자유주의의 내부 비판자로서 지난 반세기 자유주의를 포함하여 도덕철학과 정치사상에 관한 깊고도 폭넓은 통찰을 제시해온 찰스 테일러의 관점에 기대, 경제 발전에 관한 자유주의적 사고의 한계와 가능성을 논의 한다.

 

고세훈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명예교수는 “인류는 오늘날 마침내 ‘출구 없는’ 불만과 분노의 연쇄적 폭발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 다”라며 “테일러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자기 자신의 정당성 토대를 약화시키는 운명적 경향을 지녔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테일러는 1950년대 영국의 신좌파 운동에서 시작하여 최근에 이르기까지, 인식론, 철학, 종교, 언어, 정치 등에 관한 광범위한 학문적 탐구에 더하여, 오랜 세월 캐나다의 현실 정치에 깊이 개입한 데서 오는 자유주의 정치의 실천적 경험을 바탕으로, 자유주의가 지닌 이론적, 현실적 장점과 문제들에 관해 견고한 자기 입장을 구축할 수 있었다. 경제 발전과 자유주의라는 주제에 관해 테일러를 논하는 것은,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 삶의 현실적 모습과 관련해 그가 던진 질문들이 인간의 이성과 직관 혹은 지성에 의해 얼마나 깊게 사유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명료한 답을 제시하거나 질문 자체가 재구성됨으로써 해결된다면, 테일러의 경우는 명백히 후자이다. 

테일러 사상은 철학의 거의 모든 주제와 분야들을 가로지르며 침투하고 교호하되, 테일러 자신이 하나의 체계를 구축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원성, 곧 개인 삶에 나타나는 선함의 다양함, 현대인의 주체성을 형성하는 다양한 가닥/갈래들, 민주 정치를 형성하는 상이한 전통들 등을 부단히 환기시키면서, 복잡성을 단일 원칙들로 환원하거나 실천적 문제들에 대해 사전적, 이론적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유혹과 시도를 거부하며, 궁극적으로 해결은 참여자 자신이 강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테일러가 특히 문제 삼는 것은 자유주의 인식론의 도식주의 혹은 도식주의적 환원론이다. 그것은 인간은 모두 도덕적 인격체로서 평등하다는 원칙에서 출발해서 데카르트 이후 인식론 모델을 특징 지워온바, 결정의 절차, 방법, 과정에 집착한다. 그가 주류 자유주의를 “절차적 자유주의”로 명명했던 것도 그것이 이성의 한계를 첨예하게 인식하며 실질적 도덕/가치 논쟁을 이성이 해결 못한다는 자각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도식주의는 도덕적 회의주의를 피해가면서 동시에 여타의 실질적 도덕적 입장과 매우 다른 맥락의 도덕 원칙, 가령 계약 사상이나 공리주의적 원칙을 제시한다. 

테일러의 이른바 “복합적 자유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전체론”은 자유주의에 관한 그의 복잡한 심사를 읽게 한다. 그는 원자론, 국가 중립성 사상을 줄곧 비판하며 정치에서 공유된 선의 역할을 강조하는 등 전통적 자유주의 개념에 도전하면서도 개인 권리와 시민사회—시장경제, 공론장 등—의 역할을 주목하고 자유주의에 감춰진 공화주의 전통의 부활을 꾀한다. 그가 존 스튜어트 밀이나 토크빌 등의 통찰을 중시한 이유도 자유주의 전통 내부의 대화를 통해 자유주의적 가치와 실천에 대한 보다 풍요로운 설명을 위한 것이다.

테일러에 따르면, 진정한 자유는 자기 이해, 자기 통치를 동반하기 때문에 기회개념으로만 이해될 수 없고 실행 개념이 함께 고려돼야 한다. 그는 소극적 자유를 전자에 국한된 ‘엄밀한/조야한 소극적 자유’—홉스나 벤담이 주창한—와 적극적 자유 개념과 공유하는 부분으로서 ‘실행 자유’—존 스튜어트 밀이 주된 주창자인—로 구분하며, 후자를 소극적 자유개념에 편입시킨다. 적극적 자유에는 역량과 함께 자기 통치를 통한 자율성 확보 두 요소가 포함되는데, 후자는 소극적 자유의 자율성 개념—즉 자기 삶에 대한 통제의 실질적인 행사—에 닿기 때문에 소극적 자유의 장점을 포착하여 주목하는 것이다. 

테일러가 보기에 자유-공동체주의 간의 논쟁은, 둘 사이의 진정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존재론과 변론적 쟁점들이 매우 복합적이고 다층적으로 얽혀 있어서 수많은 모순과 혼란을 낳으며 진행돼왔다. 존재론적 문제란 사회적 삶을 설명하기 위해 호출하는 요소들 특히 설명의 순서에서 궁극적인 것으로 채용되는 용어들과 관련이 있다. 

테일러는, 17세기 과학혁명 이후 사람들의 의식과 심성 그리고 문화에 광범위하고도 깊게 스며들어온 자유주의적 원자주의와 절차주의적 인식론/세계관은 현대적 정체성을 규정하되, 그 ‘존재’의 외양은 가치나 공공선 등 실질적 개념의 준거점 없는 불안정한 것이어서 “현대적 질환”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관찰한다. 

인류는 오늘날 유례없이 낮은 신뢰 수준, 내적 긴장 그리고 제도로부터의 소외가 증가되고, 마침내 “출구 없는” 불만과 분노의 연쇄적 폭발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특히 소득과 특권에 대한 이전투구가 격화될수록 분배와 관련해 합의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지만, 테일러가 보기에 합의는 일정한 공동의 목적 개념 안에서만 가능하며 현대적 정체성 개념 안에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작업이다. 테일러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그것이 전제하고 주입시킨 ‘인간의 선’개념 곧 현대적 정체성으로 인해 자기 자신의 정당성 토대를 약화시키는 운명적 경향을 지녔다.

테일러에게 도덕은 일차적으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자유주의가 인식론적 그리고 정치적 절차 곧 보편적 규율과 행위 준칙에 초점을 맞추다가 진정으로 중요한 선의 문제, 곧 ‘무엇이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존중받고 사랑받을 만한가’라는 질문을 배제했다고 관찰한다. 

자유주의가 공동체의 지향점인 실질적인 도덕적 가치, 목적, 내용을 제시 또는 부과하는 일을 방기할수록 가치와 도덕을 선택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부담은 익명의 개인들에게 지워진다. 이런 부담이 버거운 개인들은 가치와 도덕의 무정부 상황에 몰리거나 상위의 초월적 가치에 목말라 하며, 기회만 있으면 그 부담을 타자에게 혹은 당대의 지배적 가치에 전가하고픈 심리를 갖게 될 터인데, 잠정적 타협 중심의 정치 과정에 대한 불만의 축적이 포퓰리즘적 선동에 길을 열어줄 계기가 이로부터 비롯된다. 히틀러의 인종주의나 트럼프의 국수주의적 담론, 우크라이나 침략 위한 푸틴의 러시아 민중 동원 그리고 작금 한국 사회에 팽배한 진영 논리에 기대 안정을 도모하려는 태도가 이와 무관하다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과학적 합리성에 입각한 단일의 의문의 여지없는 방안이나 섣부르고 어설픈 중립적 태도를 모색하거나 상대를 제압하려 하기보다는 그가 실천이성으로 명명했던 바에 따라 해석학적 탐구를 통해 오류를 제거해나가는 대안적 노선을 설득하고 탐구한다. 

실제로 테일러는 정치적 해법 곧 민주적 의지, 합의, 다수 형성을 통한 해결을 강조함으로 민주주의의 논리와 전망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인간학이 미래를 자연과학적으로 예측한다는 오만을 버리라고 충고하며, 자유주의의 위기와 가능성을 동시에 탐구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