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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당해고'가 만들어낼 아인슈타인의 십자가
 '부당해고'가 만들어낼 아인슈타인의 십자가
  • 이준영
  • 승인 2023.02.20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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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이준영 UST 과학기술경영정책 석·박사통합과정

2022년 8월, 지도교수가 나를 지도하지 않겠다며 수료 등록을 거부했다. 나는 연구원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교수는 별다른 이유가 없더라도 학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도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이 교수의 권리라는 것이 교수의 주장이었다.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는 합리적이지 않은 사유의 지도 거부를 핑계로 연구원과의 근로 계약 갱신을 거절한 것은 부당하다고 판정했다. 

부당해고의 경험을 소개하는 것을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문후속세대가 별을 꿈꾸는 사람처럼 언제나 이상을 희망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는 형편이다. 만휘군상(萬彙群象)을 깨우치는 천문학자처럼 거리를 두고 세태를 분석할 수도 없다. 기고문을 쓰는 정도의 자기 성찰이 없다면, ‘지도 교수에 눈 밖에 나면 미래가 없다’는 불안감에 별들조차 바라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내가 당한 부당해고는 학문후속세대가 생활하는 연구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직접 경험한 불안을 ‘학문후속세대의 시선’에서 말하기로 했다.

부당해고의 통보를 받은 당일에는 그렇게 불안하지 않았다. 필요한 도움을 받기도 했다. “병무청 통해 편입 취소 유보원 제출해야지”, “대학원생 노동조합 OOO님 통해 노무사 선임해야겠다”, “대학원생이라 근로자성을 인정받기 어려우니 근로자성 관련 최근 논의와 근로 계약서를 노측 증거로 활용해야겠다” 등 나름대로의 전략도 분명했다. 그동안 대학원 총학생회나 미래세대위원회 등에서 대학원생 권리 증진 활동을 하면서 축적한 노하우와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연구원 근로 계약 등의 학사 정책에 대한 학생 의견을 수렴했고, 다른 대학과 연구환경실태조사도 공동 수행했다. 장관이나 대선 후보와의 토론과 정책 연구기관 인터뷰에 참여하기도 했다. 소략하지만,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서 대학원생 경제 환경에 대한 보고서도 발표했다. 나는 그런 노력들이 제도개선의 바탕이 되어서 대학원생의 권리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과학정책 전공 대학원생으로서 대학원생은 내 정책 연구의 대상이기도 했기 때문에, 대학원생으로서는 느끼기 어려운 연구 효능감을 경험할 수도 있었다. 부당해고를 당하기 이전이라면, 나 또한 그런 경험을 별에 다가서는 마음으로, 객관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부당해고를 당하고, 돌아갈 곳이 없어지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객관과 이상은 공허해졌다. 정책을 바꿀 힘이 있는 사람과 함께 했던 토론이나, 몇 달간 조사·분석한 정책 연구는 막상 피해를 당한 대학원생에게 탁상공론이었을 뿐이었다. 결국, 개선된 것은 없었다. 심지어 나 자신도 구하지 못했다. 연구자와 활동가로서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는 자책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었다. 대학원생에 대한 정책을 연구하는 연구원이었지만 정작 피해를 당한 대학원생을 놓쳐버린 쓸모없는 연구자였던 셈이다. 정책의 효과는 보지도 못하고, 피해를 당한 학생으로 학업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는 불안에 떨었다. 

그래도 이 불안감이 학생으로서의 나와 연구자로서의 나를 마주 보게 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신앙적임 다짐은 아인슈타인의 십자가에 대한 비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문학자 존 허치라는 페가수스 자리에서 퀘이사의 빛이 앞에 있는 은하의 중력 렌즈 효과로 휘어져서 십자가의 형태로 보이는 천체 현상을 관측한다. 그는 강한 중력에 의해 빛이 휜다는 일반 상대성 이론의 명제를 예증하는 이 천체를 주창자의 이름을 따 아인슈타인의 십자가라 명명했다. 은하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퀘이사의 빛이, 은하의 중력 때문에 휘어서라도 관측자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게 갸륵하다고 해야 하나? 학생과 연구자로서의 불안이 모여서 충분한 중력이 생기면 그 불안 너머에 있는 것들을 드러내 보여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불안의 중력을 키우기로 결심했다. 다른 대학원생들도 겪는 불안감을 같은 학생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같은 연구자로서 함께 들을 것이다. 운이 좋게도, 올해부터 대학원생 노동조합의 수석부위원장으로 당선돼 많은 곳에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연구자로서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대학원생으로서 불안을 느끼고 있다면 조합에 가입해 목소리를 내주었으면 한다. 그러면 부당해고라는 면류관을 쓰고 아인슈타인의 십자가를 진 내가 보일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그 아인슈타인의 십자가를 믿게 될 것이다.

이준영 UST 과학기술경영정책 석·박사통합과정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캠퍼스에서 과학기술경영정책을 전공하고 있다. UST 제 14·15·17대 총학생회 대표를 역임했고,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미래세대위원회의 대학원생 분과 위원을 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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