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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이 만드는 규칙은 신뢰할 수 있는가
전문가들이 만드는 규칙은 신뢰할 수 있는가
  • 허유성
  • 승인 2023.02.23 08: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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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 ‘규칙의 역사’를 보는 두 석학의 시각

근대의 시작과 함께 표층규칙은 
과학, 사회, 거버넌스의 영역에서 중층규칙을 광범위하게 대체해왔고, 
이러한 변화를 추동해온 것은 인간의 주관과 재량에 대한 점증하는 불신이었다.

20세기 내내 시장에서 형성되기엔 너무 오래 걸렸을, 
그리고 정부들은 제정할 의지조차 없었던, 
바람직한 표준들을 시의적절하게 준비해낸 것은 엔지니어들이었다.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신뢰 혹은 불신은 과학기술사와 과학기술학이 다루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다. 기존 연구들은 대체로 과학과 사회,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의 제도적, 정치적 상호작용과 의사소통 방식에 집중해왔다. 최근에는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시스템의 하부구조적 ‘규칙 만들기’(rule-making)에 주목하는 연구가 늘고 있다.

예를 들면, 질병을 표준화된 코드로 분류한 국제질병분류(ICD)나 원자력 사고 가능성을 정량적으로 예측하는 확률적 위험평가(PRA) 기법은 과학기술과 관련된 의사결정에 인간의 주관적 판단을 최대한 배제하고, 과학적 원칙에 따라 일관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지식사회의 하부구조다. 이러한 하부구조적 규칙들은 사회가 끊임없이 요구하는 객관성에 대해서 전문가들이 응답한 결과물이며, 과학과 사회 사이에서 ‘신뢰의 기술’로 작동한다.

막스 플랑크 과학사 연구소(MPIWG)를 이끌었던 과학사학자 로레인 대스턴의 『Rules: A Short History of What We Live By』와 MIT 슬로언 경영대학원 석좌교수 조앤 예이츠와 웰슬리대학교의 정치학 교수인 크레이그 머피가 공저한 『Engineering Rules: Global Standard Setting Since 1880』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규칙 만들기’의 역사를 탐구하고, 우리가 어떤 규칙을, 왜 신뢰할 수 있을지를 분석한 책이다.

서로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각각 과학사와 기술사를 선도해 온 대스턴과 예이츠가 규칙의 역사라는 공통된 주제에 천착하면서도 규칙과 신뢰의 문제에 다소 상반된 관점을 보인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표층 규칙’의 확장과 실패

Rules는 고대부터 20세기 초까지 ‘규칙’의 초장기적인 개념사적 변화를 추적하면서, 동서고금에서 발견되는 규칙의 세 가지 의미군을 제시한다. ‘모델 혹은 패러다임으로서의 규칙’, ‘알고리즘으로서의 규칙’, 그리고 ‘법으로서의 규칙’이 그것이다. 

대스턴은 이 규칙들을 다시 “중층규칙”(thick rules)과 “표층규칙”(thin rules)이라는 범주로 나누어 분석한다. 차이는 규칙을 따르는 과정에서 행위자에게 얼마만큼의 유연성이 허락되는가에 있다. 중층규칙은 행위자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하는 규칙이다.

반면, 표층규칙은 맥락과 상관없이 항상 엄격하게 적용돼야 하는 규칙을 말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규칙의 역사는 표층규칙의 영역 확장과 중층규칙의 사실상 소멸로 요약된다. 

모델과 패러다임은 중층규칙에 속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대가들의 예술작품은 마땅히 본받아 습작해야 할 ‘모델로서의 규칙’으로 여겨졌지만, 언제나 해석의 가능성은 열려있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도 중층규칙으로 분류된다. 

반면 알고리즘은 표층규칙에 속한다. 일련의 단계적인 절차들을 순서에 맞게 정해진 대로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알고리즘은 해석과 전유의 자유도가 낮다. 그런데 만약 기계가 알고리즘을 수행한다면 그 어떤 해석과 전유도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현대의 머신러닝 알고리즘은 “가장 표층적인 규칙”(thinnest rules)이다.

법과 규제는 조금 복잡하다. 보편성과 지속성 측면에서 이 둘은 서로 대립항이다. 자연법과 자연법칙처럼 법은 보편성과 항구성을 지향하는 반면, 규제는 보다 구체적이고 일시적인 강제성을 지닌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법은 규제의 형태이기 때문에 표층규칙에 가깝다.

대스턴은 알고리즘과 규제 같은 표층규칙의 확장이 19세와 20세기를 거치면서, 특히 민족국가와 산업사회의 성장과 맞물려 가속화되었다고 설명한다. 기계 알고리즘의 리듬에 맞춰 하나의 부품처럼 조직되고 움직였던 19세기 공장 노동자들의 일상이나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근대국가의 그 숱한 규제들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대스턴은 인간의 운신을 제약하는 표층규칙은 대체로 신뢰를 형성하는 데 실패해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명시적인 규칙들은 팬데믹과 같은 예외적 상황에서는 너무 쉽게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패를 보완하는 것은 잘 선택된 ‘모델로서의 규칙’이다.

대스턴은 오늘날의 과학기술 거버넌스에서 그러한 모델이 무엇인지 구제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모델이 있다면 예외적인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표층규칙들을 재조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발적 표준 제정과 엔지니어  

Engineering Rules에서 예이츠와 머피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민간의 자발적 표준제정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우리가 표준이라는 과학기술적 규칙을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제시한다. 대스턴의 Rules가 표층규칙의 역사적 실패를 보여준다면, 이 책은 반대로 그 성공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 책이 다루는 표준은 기술적 인공물의 형태, 규격, 품질 등을 통일함으로써 생산, 운송, 사용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산업표준(혹은 기술표준)이다. 산업표준은 비영리, 비정부 표준화 기구들이 제정하는데, ‘자발적’이라는 말은 이 기구의 표준 위원회와 그 구성원들이 합의에 의거해 표준화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주로 엔지니어들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특정 표준과 관련된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표준을 제정한다. 

표준은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산업사회의 기술경제적 질서를 결정하는 규칙이다. 따라서 예이츠와 머피는 표준을 “글로벌 경제의 핵심 하부구조”라고 정의한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표준을 누가 어떻게 정해야하는지는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공공의 이익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정부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할 수도 있고, 기업과 소비자의 경제적 이해와 직결된 만큼 시장 매커니즘을 앞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은 20세기 내내 “시장에서 형성되기엔 너무 오래 걸렸을, 그리고 정부들은 제정할 의지조차 없었던, 바람직한 표준들을 시의적절하게 준비해낸” 것은 엔지니어들이었다고 말한다.

19세기 후반 서구의 산업화,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례 없는 수준의 국제적 경제교류, 그리고 20세기 후반 인터넷이라는 전 지구적 네트워크의 등장은 때마다 국내외에서 핵심적인 기술들(철도, 선박 컨테이너, 그리고 인터넷 프로토콜)의 표준화를 주도한 엔지니어들 덕분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일부 표준화 연구자들은 이러한 민간의 표준화 기구들이 하부구조 조작을 통해 은밀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시사해왔다. 그러나 예이츠와 머피는 엔지니어들이 자발적 합의라는 민주적 정당성에 기반해 표준을 제정해왔음을 강조한다. 20세기를 돌아보며 저자들이 엔지니어들로부터 발견한 것은 민주적 권력의 찬탈도, 경제적 이득의 탈취도 아닌 그들의 선한 의지였다. 

‘규칙’에 대한 신뢰

이렇듯 두 책은 상반된 방식으로 규칙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상보적 독해도 가능하다. 예이츠와 머피가 묘사한 엔지니어들의 표준제정 방식은 대스턴이 말한 중층규칙과 표층규칙의 조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여기서 표준 엔지니어들의 표층규칙 만들기는 ‘자발적 합의’라는 민주적 모델에 의해 사회적 신뢰를 획득한다. 이렇게 잘 선택된 모델이 있다면 우리는 표준을 신뢰할 수 있고, 표준체제의 급격한 변동 혹은 붕괴라는 예외적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새로운 하부구조적 질서를 정립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모든 규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민간의 자발적 표준제정에서 배제된 참여자들은 없었는가. 국제적 표준 위원회들은 경제적, 정치적 종속의 위험으로부터 여전히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가. 거버넌스 영역에서 인공지능 알고리즘의 활용은 사회적 신뢰를 수반할 만큼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 제기는 불신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건강한 회의주의이며, 과학기술 거버넌스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두텁게 하는 또 하나의 ‘신뢰의 기술’이다. 과학기술학 연구자들의 몫이자 책임이다.

허유성 객원기자·듀크대 사학과 박사과정
고려대 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은 후 듀크대 사학과에서 ‘냉전기 독일의 과학기술사’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는 독일 포츠담현대사연구소(ZZF)에 방문연구원으로 있다. 동독의 기술관료제적 경영정보시스템과 지식 하부구조에 관해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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