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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일그러진 영웅주의…타인을 제물로 삼다
인간의 일그러진 영웅주의…타인을 제물로 삼다
  • 강우성
  • 승인 2023.03.03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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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말한다_『악에서 벗어나기』 어니스트 베커 지음 | 강우성 옮김 | 필로소픽 | 336쪽

인간의 취약성이 원죄, 유일한 속죄는 ‘영웅주의’
‘신·왕권·권력·돈’으로 변신 거듭하는 영웅적 화신

49세에 요절한 문화 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는 20세기 사상사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존재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냉전 절정기의 미국에서 활동했지만, 사상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 본성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했지만, 정신분석 이론의 전제들을 쉽게 수용하지 않았다. 인류의 문화사를 서술하되, 경제와 사회구조의 변천을 토대로 삼거나, 반대로 개체의 생물학적 본능론에 의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책은 퓰리처상 수상작이자 최고 역작인 『죽음의 부정』의 후속편이자 유작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온갖 문화적 형식들은 결국 죽음의 필멸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끈질기면서도 애처로운 노력의 산물이라는 주장이다. 『악에서 벗어나기』는 이 주장을 다른 각도에서 더 밀고 나간다. 저자가 ‘불멸성의 이데올로기’로 이름 붙인 이 문화적 형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초인간적 신성이나 권력을 숭배하는 ‘영웅주의’로 귀결된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왜 하필 영웅주의인가’라는 화두에서 출발한다. 좀 더 현실적인 질문으로 바꿔보면, 어째서 20세기 계몽된 인류는 근대의 정점에서 자기 파괴적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만들어냈을까? 베커가 내놓은 테제는 군집성 인간의 자발적 예속성이다. 『죽음의 부정』에서 이 ‘자발적 자기소외’는 죽음이라는 무의미가 주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가 불가피하게 감수한 희생이었는데, 이 책에서는 생태계 속 인간의 근본적 취약성을 탈피하려는 집단적 욕망으로 인해 ‘타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사악한’ 논리가 된다. 죽음을 넘어선 불멸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인간은 기꺼이 자기 자신을 ‘영웅적’ 권력에 의탁하고 타인을 제물로 바친다.

한마디로 동물이 되고 싶지 않은 인간의 악의 없는 욕망과 영웅숭배가 타인을 지옥으로 만드는 악의 기원이다. 인간의 자발적 자기소외는 타인의 희생 없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육체적 필멸성을 거부하고 영혼의 불멸을 원하는 인류의 문화적 충동은 유전적 형질이 아니다.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불멸성의 상징’을 통해 학습되어 축적된 결과이고, 영웅주의는 그 총아다. 우주적 영혼, 제도화된 신, 세속적 왕권, 독재 권력, 그리고 금권(돈)으로 영웅의 화신은 변신을 거듭한다. 우리 시대의 영웅적 화신은 무엇일까? 

영웅주의가 만들어 낸 악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인간 불평등’이라면, 그 이면에는 ‘자연의 대상화’가 또한 숨겨져 있다. 인간을 위해 자연을 지배한다는 ‘선의’가 인간의 불평등으로 귀결된다는 역설이다. 베커에게 이 역설은 “악에 대한 영웅적 승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충동으로부터 악이 발원한다”라는 문구로 집약된다. 

인간의 취약성이 원죄이기에 유일한 속죄의 방편은 영웅주의가 된다. 영원히 살기 위해 인간은 기꺼이 죽는다는 것이 『죽음의 부정』에 담긴 진실이었다면, 『악에서 벗어나기』에는 인간이 불멸을 이루기 위해 타자를 기꺼이 속죄양으로 삼는다는 통찰이 담겨 있다. 자기 속죄를 위해 영웅 시스템을 만들고 타자를 제물로 삼는다는 인간 악의 맨 얼굴이 베커에 의해 드러난다. 

 

어니스트 베커(1924∼1974)는 미국의 문화 인류학자였다. 사진=위키피디아

자,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우주 어딘가에서 제물로 삼을 또 다른 타자를 찾아내거나 만들어 낼 것인가, 아니면 삶과 죽음, 나와 너를 갈라놓는 영웅주의 시스템을 해체할 것인가. 『악에서 벗어나기』에는 인간이 악을 탈피할 수 있는 통찰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세와 인공지능의 시대를 동시에 살아가는 고난의 인간에게 삶의 지침이 될 값지고 근사한 지혜들이 가득하다. 

 

 

 

강우성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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