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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이 종교가 아닌 이유
주역이 종교가 아닌 이유
  • 김근
  • 승인 2023.03.09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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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주역, 타이밍의 지혜』 김근 지음 | 삼인 | 720쪽

미래의 불안 체계화하는 철학·과학에 가까워
윤리의식 갖춘 인간, 64괘 순환하며 역사 창조

처음 거친 세계에 던져진 인간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다. 짐승은 위험이 닥치면 그 자리를 재빨리 떠나는 것으로 해결하지만, 인간은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걸 안다. 그래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갖가지 방법을 고안했는데, 형이상학과 종교 같은 게 대표적인 예이리라.

 

라캉은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환상이야말로 거친 세상을 안전한 환경으로 코팅해 주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는 개념은 이로부터 나왔다. 주관적인 상상이 세계를 안전한 곳이라고 믿게 해주기는 하지만, 그 안전이 담보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제도와 법, 종교 등과 같은 상징체계를 만들어 안전을 확보해왔다. 이렇게 해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실재계는 여전히 남아있으니, 인간의 고뇌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고대 중국인들도 이 고뇌를 해결하기 위해 거북점(龜卜)을 고안해 실행하고 그 기록을 남겨왔다. 기록이란 오래돼 많이 쌓이면 거대 담론을 낳는 법이다. 『주역』은 이러한 토대에서 나왔다. 점은 불안한 실재계를 상징계 안으로 포섭하려는 노력이지만 기실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주역』 4성(四聖)의 첫째 인물로 꼽히는 문왕은 오랜 고난 끝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는 실재계에도 순환의 원리가 있다고 믿고 이를 64괘의 괘상을 통하여 서술했으니 이것이 『주역』이다. 

주체가 64괘 중 어느 국면에 있는지만 안다면 그는 정해진 과정을 따라가게 돼 있다는 게 『주역』의 이치다. 미래가 이치 안으로 포섭됐다면 실재계가 상징계 안으로 들어온 셈이 된다. 즉 미래의 불안이 체계화로 해소됐으니 『주역』은 더는 종교가 아니고 오히려 철학(과학)에 가까워진 것이다. 

『주역』이 철학적 성격을 띤 것은 계사, 즉 문왕과 주공이 단 언어 때문이다. 『주역』이 전통적으로 경학의 영역에서 다뤄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상수학과 달리 의리학이라고 부른다. 괘효 자체에 대한 해석이 위주가 되는 상수학의 경우는 여전히 종교적 색채는 유지된다.

『주역』의 괘사와 효사는 갑골복사에서 기원했기에 그 시기의 글쓰기에 기초한다. 따라서 대략 삼천 년 후인 오늘날의 안목으로 보면 자연히 다양한 해석으로 읽힐 수밖에 없으니, 이 중에서 골라야 한다면 그 기준은 윤리다. 왜냐하면 윤리라는 관념 안에서만 인간사는 자연현상처럼 순환하기 때문이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왜가리는 물고기의 긴장과 이완이라는 두 가지 자연적 순환을 이용해 먹고 살아가는 반면에, 윤리의식이 있는 인간은 64괘의 과정을 순환하며 역사를 만들어간다. 손오공이 제아무리 재주를 부려도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듯이, 인간은 정해진 64괘의 순환고리 밖으로 튀지 못하는 원리 안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주역』이 철학(과학)의 범주 안에 있다고 말하였다.

필자는 현직 시절에 『주역』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경학을 연구하면서 자주 접하였다. 이때 우리말 번역본도 자주 참고했는데, 내용 면에서는 모두 일가의 공력이 돋보였지만, 오늘날 한자어에 익숙하지 않은 한글세대가 볼 때는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쉽게 써보자는 의도로 기획한 것이니, 의의는 학술이 아니라 통속(通俗)에 있다고 하겠다. 이를테면, 각 효의 명칭을 ‘제1 양효’(初九), ‘제2 음효’(六二) 등으로 번역한 것도 이런 의미에서였다.

필자의 사견으로는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흔들리지 않는 멘탈이다. 지도자가 흔들리면 조직의 구성원들이 공황에 빠지지만, 꿋꿋함을 보이면 안정과 함께 의지를 불태운다. 이 멘탈은 지도자의 믿음에서 나오는데, 이는 자신이 필연적인 과정 안에 있음을 깨닫는 데서 비롯된다. 다음에 전개될 일이 눈앞에 보이는데 흔들릴 까닭이 없다. 필자가 ‘리더는 『주역』을 읽는다’라는 부제를 단 이유다.

 

 

 

김근
전 서강대 중국문화 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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