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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땀’ 냄새나는 역사…‘아날학파’를 만나다
‘살·땀’ 냄새나는 역사…‘아날학파’를 만나다
  • 이기영
  • 승인 2023.03.08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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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말하다_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성격』 마르크 블로크 지음 | 이기영 옮김 | 사회평론아카데미 | 580쪽
『서유럽 농업사 500-1850년』 슬리허르 판 바트 지음 | 이기영 옮김 | 사회평론아카데미 652쪽

문헌사료 넘어 경지·촌락에 대한 분석
집단 중시하며 비교사적 연구방법 활용

두 저서는 모두 농업사를 다루고 있다. 동양과 마찬가지로 서양에서도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기 이전에는 농업이 사회의 경제적 기초였다. 대다수 사람은 농촌에서 살았기 때문에, 농업사는 서양의 역사와 문명 이해에서 필수적이다. 두 책의 번역개정판을 내게 된 것은 무엇보다 이들 책이 이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농업사의 고전들이기 때문이다.

 

마르크 블로크의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성격』은 기존의 농업사 저술들과는 확연히 구별되고 사학사적으로도 중요한 획기적인 노작이다. 저자는 20세기 프랑스 농촌사회의 구조적 주요 특징들인 중소 규모의 농민적 토지소유와 대토지소유의 병존, 지역별 상이한 경지제도의 분포 등의 현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해명한다. 그러면서 토지이용 방식, 경지제도, 장원의 구조와 변화, 농촌공동체 등의 주제들을 중심으로 프랑스 농촌의 물질적․정신적 구조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재구성한다. 따라서 그의 농촌사는 법적․제도적 측면에서 시대순으로 서술한 종래의 농업사 개설서와는 전혀 다른, 문제 중심의 전체사이고 사회구조사라고 할 수 있다. 

사용된 사료와 연구방법도 혁신적이다. 전통적 농업사가들이 특허장과 같은 증서류를 주로 사용한 데 비해, 블로크는 지적부와 지적도, 관습집, 진정서, 각종 단체의 결의사항, 문학작품 등 그전에는 이용되지 않던 사료를 활용한다. 그렇지만 그는 문헌사료에만 의존하지 않고, 농민들이 실제로 일하고 생활했던 경지형태나 촌락의 흔적과 같은 제도적․물질적 잔존물에 대한 분석을 통해 구체적인 과거의 모습을 재구성하는 소급적 연구방법을 사용한다. 또한 프랑스 농촌사에서 나타난 주요 현상이나 변화의 의미를 정확히 포착하기 위해 유럽적 차원에서 비교․분석하는 비교사적 연구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연구방법론은 이 책의 서론에서 특별히 다뤄지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성격』은 유명한 아날학파의 창시자 마르크 블로크의 독창적 역사 인식과 연구방법론이 가장 잘 구현돼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블로크는 문헌사료에 의존한 사건사 내지 제도사 위주의 직관적․반(反)과학적 성향을 지닌 랑케류의 역사학에 반대하고, 제도나 사건 또는 풍경이나 문서 너머에 있는 ‘살 냄새와 땀 냄새가 나는 인간적인 역사’를 지향했으며, 사회 전체의 구조와 변화를 인간적이며 과학적인 차원에서 연구하는 새로운 역사학의 지평을 연 역사가였다. 이 책의 곳곳에서 블로크가 제시한 연구지침과 연구방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오늘날까지 사회경제사학계에 계승․발전되어 많은 연구성과를 낳고 있다.

슬리허르 판 바트의 저서 『서유럽 농업사 500-1850년』는 어떤 면에서는 역사에 대한 블로크의 견해를 구체적인 농업사 개설에서 더욱 발전시킨 모범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자서전에서 마르크 블로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실제로 사회사적 역사의 추구, 역사연구의 대상으로서 개인보다 집단의 중시, 사회과학 이론의 원용, 비교사적 연구방법의 활용, 계량적 방법의 사용 등을 특징으로 하는 저자의 역사 인식과 연구방법은 아날학파와 상당히 유사하다. 

블로크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저자는 『서유럽 농업사 500-1850년』의 저술을 통해 블로크가 농업사 연구의 발전을 위해 제안한 연구방법들 중 상당 부분, 즉 문제를 명확화하기 위한 학문적 성과들의 종합화, 정확한 문제제기를 위한 유럽적 차원의 비교사적 방법의 사용, 역사 서술의 수치화 등을 실현하고 발전시켰다. 특히 저자는 농업생산성, 인구, 곡물가격을 비롯한 가격, 임금, 농민의 각종 부담금, 농업경영 비용 등에 관한 자료를 백분율, 지수, 평균치, 상관관계, 그래프 따위로 표시하는 계량적 방법을 많이 사용하여 설명함으로써 2세대의 아날학파가 추구했던 계량적 역사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슬리허르 판 바트의 이 저서를 농업사의 고전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서유럽의 농업사를 학술적으로 수준 높게 개관한 서적으로는 최초라는 점이다. 이 책 이전에는 앞의 마르크 블로크의 저서에서도 보듯이 농업사의 저술들이 한 나라의 역사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이 책에 필적할 만한 유럽적 차원의 농업사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기영
동아대 명예교수·서양중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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