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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정신’이 새로운 ‘시대정신’이고 ‘인문정신’이다
‘과학정신’이 새로운 ‘시대정신’이고 ‘인문정신’이다
  • 엄정식
  • 승인 2023.03.0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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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_ 엄정식 서강대 명예교수·철학

 

엄정식 서강대 명예교수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다. 하나는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세상이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세상을 잘 보아내기 위해서 안경을 쓰기도 하고, 전문가들은 망원경이나 현미경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보아낸 세계는 사물과 객관의 세계라고 한다. 아마 과학은 이러한 세상을 더 잘 보아내기 위하여 고안된 지식의 체계일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장치만을 가지고서는 눈을 감아야 보이는 세상을 볼 수는 없다. 가령 별들의 세계에 관해 생각해보자. 천문학자는 성능이 좋은 망원경을 가지고 있을 경우 안드로메다 은하계 같이 아주 먼 거리에 있는 별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좋은 망원경을 지니고 있더라도 알퐁스 도데의 『별』이나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별, 베들레헴의 그 별, 혹은 윤동주의 「서시」에 나오는 그 별을 볼 수는 없다. 그러한 별들은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보아낸 세계는 가치와 의미의 세계이며, 그것은 주로 인문학에서 다루어진다. 

인문학과 과학의 구분이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다. 인문학의 중심 과제인 자아와 인간의 본성에 관한 탐구는 시대마다 그 비중과 성격을 달리해 왔으며, 과학도 그 탐구의 영역이 확장되고 심화됨으로써 오늘날 그 구분이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회생물학이나 신경생리학, 인지과학 등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시간과 공간, 물질과 정신, 주관과 객관, 인간과 동물, 죽음과 생명 등에 관한 전통적 기초 개념들이 흔들리고 있는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최근에 혁신적인 최첨단 과학기술의 등장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여러 제도뿐만 아니라 생활양식과 사고방식과 함께 인간의 정체성마저 다시 규정해야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은 『제4차 산업혁명』의 ‘서문’에서 이 혁명은 “다양한 과학기술을 융합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변화를 일으킨다”고 역설하고 있다. 과학과 인문학의 구분이 모호해졌을 뿐만 아니라 서로 양립하고 보완관계를 이루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인문학 혹은 철학으로부터 분화된 서양 근대 과학의 특징을 세 가지로 규정한다. 수학적 정밀성, 기계적 인과성, 그리고 실험적 경험성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철학과 과학이 아직 뚜렷하게 분화되기 이전에도 탐구의 특성으로 나타났던 것이 사실이다. 

가령 피타고라스는 우주가 수로 구성되있다고 하여 우주의 본질을 수학적 체계의 관점에서 해명하려고 하였으며,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론을 제창하여 우주가 원자들의 기계적인 운동의 결과라고 주장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나 히포크라테스는 생물학과 의학 분야에서 주의 깊은 관찰과 함께 ‘실험’이라는 것을 시도한 흔적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동아시아를 비롯한 다른 문화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근대과학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괄목할만한 현상은 이 세 가지 분야가 더욱 심화되고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유기적인 형태로 보완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중에서도 근대과학의 특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실험의 방법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과학적 탐구의 중심적 위치를 점유하게 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물론 실질적으로 전통적인 방법보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더 유용하고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러셀(B. Russell)은 인류의 역사가 세 가지 투쟁, 즉 자연과의 투쟁, 다른 인간과의 투쟁, 그리고 자신과의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석한 적이 있다. 이러한 투쟁에서 이겨내기 위하여 그동안 우리는 자연을 가공하고 문명과 문화를 일구어냈으며, 마침내 자연과학을 창출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른 인간과의 투쟁도 인간 속에 있는 ‘자연’과의 투쟁이며, 나 자신과의 투쟁도 내 안에 있는 ‘자연’과의 투쟁이라는 측면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것이 그동안 경제학이나 정치학, 사회학 등 사회과학이 다양하게 발달해 왔으며, 철학과 역사학, 신학이나 문학 등 인문학이 자연과학 속으로 흡수되어온 이유일 것이다. 

한편 러셀은 과학기술의 시대인 현대에는 그동안 전개되었던 투쟁이 매우 격렬해져서 그 위험도 전시대와 비견되기 어려울 정도로 심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더욱 절박하게 합리적이며 창조적인 희망을 필요로 한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감정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신념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러셀은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비판적 이성과 실증적 증거에 바탕을 둔 열린 자세, 즉 합리적 과학정신으로 무장할 것을 권고한다. 과학정신은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며 새로운 ‘인문정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엄정식 서강대 명예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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