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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영어를 섞어 써야 할까
꼭 영어를 섞어 써야 할까
  • 김병희
  • 승인 2023.03.13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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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_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최근에 어떤 교수님을 만나 한 시간가량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내내 조금 불편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세미나가 일찍 끝나자 이른 저녁을 먹기도 어중간해 차 한 잔 마시자며 따로 만났다. 학술적인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자리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을 나누는 지극히 사적인 시간이었다. 그 교수님은 중간에 영어를 과도하게 섞어 쓰며 말씀을 이어갔다.

“릴레이션십(relationship)이 정말 중요한데, 우리 아카데미(academy)의 멤버들(members)은 그런 니즈(needs)가 부족해요.” “소셜 사이언스(social science)를 연구하는 아카데믹 소사이어티(academic society)에서 오리지낼러티(originality)를 주장하기 어려운데, 그런 베이직(basic)한 콘텍스트(context)를 니글렉트(neglect) 하는 케이스(case)가 많아요.” 조사 빼고는 거의 영어인 이런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했다.

한국인끼리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습관적으로 영어를 섞어 쓰는 안타까운 풍경이었다. 그 교수님은 영어를 섞어 써야 유식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습관적으로 쓰다 보니 자신의 화법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학술대회 발표장에서는 어떤 외래어 학술용어를 놓고 발표자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다. “커미트먼트(commitment)가 중요한데, 이거 한국말로 뭐라고 하죠? 딱 맞는 말이 없으니 그냥 커미트먼트라고 할게요.” 잘 모르겠다며 애써 고개를 갸우뚱하는 표정이 꽤 거시기할 때도 있다. 발표 논문의 맥락에서 보면 약속을 지키는 책임감의 뜻이었다. 어쨌든 커미트먼트 말고 약속이나 책임 또는 헌신 같은 우리말로 말하면 안 될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을까?

영어의 남용을 어찌 교수들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한자 혼용을 영문 혼용으로 바꾼 문재인 정부의 국어 정책이 영어의 남용을 더욱 부채질했다. 정부의 일반 문서에서부터 정부 정책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영어를 너무 자주 애용했다.

정부 정책의 이름에서 영어를 남용한 사례로는 “그린 뉴딜, 휴먼 뉴딜, 디지털 뉴딜” 같은 뉴딜 정책이 대표적이다. 중앙 정부에서 그렇게 했으니 여러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공공기관에서도 정책을 알리는 글에서 영어를 마구 섞어 썼다. 중앙 정부부터 위반을 밥 먹듯이 했으니, 국어기본법은 있으나 마나였다.  

일찍이 주시경(1876~1914) 선생은 우리말을 ‘한말’로 우리글의 이름을 ‘한글’이라 짓고 우리의 말글을 바르게 살리려고 애썼다.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선생이 남긴 이 말씀에는 나랏말은 그 나라의 얼이고 넋이란 뜻이 담겨있다.

『뿌리깊은 나무』(1976년 3월~1980년 8월)를 펴낸 한창기 발행인은 영어에 능통했다. 이 잡지는 어려운 한자말이나 외래어를 배격하고 한글 전용을 고수한 것으로 유명한데, 발행인도 말할 때 영어를 섞어 쓰는 행태를 싫어했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의 판매 사원 출신인 그는 영어를 잘 했지만 외국인과 대화할 때가 아니면 영어를 쓰지 않았다. 한국인끼리 대화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영어를 섞어 쓰는 사람들이 본받을만한 대목이다.

교수를 비롯한 여러 지식인들의 언어 사대주의는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 온전한 영어 문장을 자유자재로 제대로 구사하지도 못하면서, 우리말의 중간에 영어의 명사나 형용사를 슬쩍슬쩍 섞어 쓰는 습관은 고쳐야 한다. 영어를 그대로 쓰고 있는 학술 용어도 알기 쉬운 우리말 표현으로 바꿔야 한다.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와 국어문화원연합회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학술용어 정비사업’이 중요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불필요한 영어 사용은 이제 그만! 그래야 주시경 선생의 말씀처럼 말이 오르고 나라도 오를 것이다. 영어는 해외에 나갈 때만 쓰자. 외국인을 만나거든 단어만 나열하지 말고 온전한 영어 문장으로 제대로 말하자.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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