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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국가 폭력성 넘기…새로운 상상력으로
국민국가 폭력성 넘기…새로운 상상력으로
  • 김종욱
  • 승인 2023.03.17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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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한국문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김종욱 지음 | 역락 | 472쪽

제국 일본의 문화적 자장에 갇힌 한국 문학
야만으로 강등된 중국, 제국 바깥을 상상

우리는 문화를 떠올릴 때마다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경계선을 부각시켜 정체성을 확인한다. 하지만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딱딱하게 고정되기보다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쉬지 않고 변화한다. 그러니 어떤 문화의 정체성을 언어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과거의 문화를 연구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이미 지나가버린 어떤 시기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명하고자 할 때 우리가 기껏 동원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한순간에 고정된 텍스트에 불과하다. 그렇게 스틸 사진처럼 포착된 순간들을 시간 속에서 배열하여 역동적인 흐름을 만들어내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한국의 근대 문학에 대한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에 이 땅에 살던 많은 사람들의 문화적 경험은 텍스트라는 흔적만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그 흔적들을 온전하게 해석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언제나 연구자의 현재, 곧 텍스트의 미래에 붙잡혀 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것, 보고 싶은 것만을 텍스트에서 찾는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가 한국 문학에서 제국 일본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텍스트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라 텍스트를 바라보는 연구자가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제국의 문화적 헤게모니 아래 형성되고 발전된 문학 개념을 받아들이고 또한 거부하면서 성장한 까닭에 긍정적·부정적 방식으로 제국의 문화적 자장에 갇힌 셈이다.

 

몇 년 전 이런 생각들에서 『한국 문학의 동아시아적 지평』에 대한 몇몇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서 텍스트를 바라보면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출발점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어렵사리 과거로 자리를 옮겨도 여전히 시야의 중심에는 제국이 존재했다. 근대와 달랐지만, 봉건 시대에도 제국 체제는 강고했다. 동아시아에서 제국 체제는 상수였고, 중심 지역이 변수였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제국 체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제국의 중심을 향하는 눈길을 거두고 제국의 바깥으로 시선을 보내야 했다. 

한때 제국의 중심이던 중국은 근대 체제가 형성되자 정치적 변경이자 문화적 야만으로 강등됐다. 그래서 제국의 확장을 위한 영토 전쟁의 대상이었지만, 제국의 바깥에서 제국을 바라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사실 일제 강점기 동안 많은 문학인들이 일본식 교육을 받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침윤됐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중국으로 망명이나 유학을 떠났다. 그들이 읽던 책, 그들이 사용한 언어, 그들이 느낀 체험 속에는 새로운 상상이 즐비했다. 

제1부에서는 근대 문학의 출발점이던 신소설을 봉건적인 군주제에서 벗어나는 정치혁명을 도모했던 중국 개혁 사상가들에 비추고자 했다. 그 결과 신소설이 낡은 이념에 갇힌 퇴행적 양식이라는 사실을 씁쓸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벗어난 것은 3·1운동의 경험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었지만, 문학사적으로는 안창호를 매개로 신민회를 계승한 흥사단 덕분이었다고 믿는다. 1920년대 중반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로 분화하던 모습을 미리 보여준 가늠자였음도 제2부에서 말하고자 했다. 제3부는 만주에 초점을 맞추었다. 제국의 인구 관리에서 벗어나 자발적으로 난민의 길을 택했던 망명자와 제국의 확장에 편승해 개인의 이익을 도모했던 이주자의 모습은 만주에서 선명하게 대비됐다. 그리고 펄 벅이 동아시아에서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달리 수용됐고, 때로는 제국의 영토 야욕과 결합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만주라는 장소성 덕분이었다.

제4부는 제국이 붕괴된 후 국민국가 체제로 재편되던 1945년 이후를 다루었다. 국민으로 탄생하는 과정에서 재구성되는 기억이라든가, 국가 건설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적 폭력 등에서 제국을 넘어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국민국가의 폭력성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에 대한 개인적인 고민을 담은 것이 제5부이다. 징병제에 기반한 전쟁 동원 체제를 위시해 난민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여 국가폭력에 무감각하도록 만드는 기법 등을 동원하는 것이 국민국가이기 때문이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 근대 문학은 제국의 시대를 벗어나 국민국가의 시대로 이행해왔다. 하지만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국민국가라는 경계로 환원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동안 제국 일본의 압도적인 영향력 속에서도 끊임없이 제국 바깥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동아시아의 또 다른 구성원이던 중국이었다. 분단 체제로 말미암아 상실했던 동아시아적 지평을 다시 복원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김종욱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서울대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저로 『한국소설의 시간과 공간』, 『한국 현대소설의 서사형식과 미학』, 『한국 현대문학과 경계의 상상력』, 평론집 『소설 그 기억의 풍경』, 『텍스트의 매혹』, 편저 『한국신소설선집』, 『심훈전집』 등이 있다. 대한제국기 신소설과 염상섭, 이기영 등 한국 리얼리즘 작가들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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