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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대중화, 쉽지 않은 이유
철학의 대중화, 쉽지 않은 이유
  • 박찬구
  • 승인 2023.03.16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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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서양 윤리 사상의 이해』 박찬구 지음 | 세창출판사 | 316쪽

철학의 빈곤화는 철학이 방대하고 어렵기 때문
쉬운 철학·쓸모 있는 윤리학으로 재구성

철학과에 입학해 램프레히트(1890∼1973)의 『서양철학사』로 강의를 들을 때부터 저자가 꿈꾸었던 일이 한 가지 있다. 언젠가 이런 책을 통독해 나름대로 소화한 다음 마치 이야기처럼 풀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책이 잘 읽히지 않았고,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여기에는 아마도 번역의 문제, 철학적 개념 자체의 난해함, 그 개념이 탄생한 문화적 토양의 차이 등이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야망인 ‘인생과 우주의 근본 문제(신비)를 해명하고 싶다’는 꿈은 이런 벽 앞에서 꼬리를 내리기에 십상이다. 철학이 지닌 원초적 매력에도 불구하고 철학의 대중화가 쉽지 않은 이유와 근래에 많은 대학에서 철학과가 문을 닫은 이유도 어쩌면 이런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프랑스의 대학입학 자격시험에서 ‘철학’은 아주 중요한 과목이다. 모든 답안을 논술로 작성하는데도 출제나 평가에서 문제가 제기됐다는 말은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고교에서의 철학 교육이 이미 오랜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는 프랑스의 교육 당국이 일찍이 청소년 교육에서 철학적 사고와 성찰의 중요성을 인식한 결과일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정규 교육과정에서 철학 교육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과거에 필수과목이었던 대학의 ‘교양철학’조차 이제는 소수만이 선택하는 과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철학의 빈곤’이 현실화한 모양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고교 교육과정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하나 열려 있다. 수능 사회탐구 과목 중에 ‘생활과 윤리’와 ‘윤리와 사상’이라는 과목이 개설돼 있는 것이다. 전자는 일종의 ‘응용윤리’로서 일상 생활에서 마주치는 윤리적 딜레마들을 다루는 과목인데, 현재 사회탐구 과목 중 가장 많은 학생이 선택해 배우고 있다. 후자는 이러한 응용윤리의 배경이 되는 ‘윤리학’을 공부하는 과목이다. 잘 알다시피 윤리학의 배후에는 인류 역사와 더불어 발전해 온 방대한 철학사상이 놓여 있다. 우리 고교생들은 이 두 과목을 통해 사실상 철학 교육을, 아니 프랑스 고교생들 못지않은 철학적 사고 훈련을 받고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생활과 윤리’를 통해서는 ‘쓸모 있는 윤리학’을, ‘윤리와 사상’을 통해서는 ‘쉬운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셈이다. 

『서양 윤리 사상의 이해』는 이러한 ‘쓸모 있는 윤리학’과 ‘쉬운 철학’을 위해 쓰인 책이다. 얼핏 보기에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헬레니즘 시대, 그리고 중세와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서양 윤리 사상의 흐름을 한 권의 책에서 모두 다룬다는 것은 다소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너무 많은 내용을 다루다 보면 읽기에 부담스러워질 수 있고, 그렇다고 너무 간략하게 서술하다 보면 수박 겉핥기식의 내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는 고교 교사 시절의 문제의식을 소환하기로 했다. 서양 윤리 사상의 핵심 내용을 고교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쉬운 글쓰기로 한번 짜임새 있게 재구성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글쓰기가 철학을 따로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도 ‘철학의 대중화’ 및 ‘윤리학의 쓸모’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 책을 구성하는 데 저자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사상가들의 저술을 직접 인용한 부분이다. 이렇게 원전의 인용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게 된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고교 시절 저자는 원래 이과반 학생이었고, 재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전공 분야를 문과로 바꾸게 된 것은 여름방학 직후였다. 그때 문과반에서 윤리(당시에는 ‘국민윤리’)를 가르치시던 선생님의 교재가 진로를 결정짓는 계기가 됐다. 당시 재수학원에서는 과목 담당 선생님이 직접 만든 교재를 사용했는데, 그 교재 속에 인용된 철학자의 한마디 말이 어떤 깨달음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결국 저자는 당시 학원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철학과로 진학했으며, 그의 뜻을 거스른 일을 결코 후회한 적이 없다. “위대한 사상가의 한마디는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저자가 인용문에 특별히 신경을 쓰게 된 이유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사상가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깨우침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찬구
서울대 명예교수·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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