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8 17:30 (목)
고향을 소환하는 서정시 혹은 능청맞은 구라
고향을 소환하는 서정시 혹은 능청맞은 구라
  • 김병희
  • 승인 2023.03.23 09: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19 황석영의 『객지』

젊음의 치기였겠지만 모 대학의 국어국문학과를 그만두고 다른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편입하는 문제를 깊이 고민한 적이 있었다. 황석영(1943~)의 『객지(客地)』를 읽고 나서였다. 그의 소설은 질박한 현실에 대한 장면 묘사나 구성이 탁월했고 문장의 밀도가 촘촘했다.

문학이론 강의 위주인 국어국문학과에서는 창작을 배울 수 없어 편입을 생각했었는데, 문예창작과에 다닌다 해서 창작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 미숙했다. 차라리 대학을 관두고 공사판이나 저잣거리에서 숱한 경험을 하는 게 더 옳은 선택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일급 작가가 된다는 보장도 물론 없지만. 아, 이런 문장을 나도 쓸 수 있을까? 황석영의 소설은 나에게 짙은 열등감을 안겨주었다.

창작과비평사의 『객지』 광고 (동아일보, 1974. 7. 2.)

창작과비평사의 『객지』 광고를 보자(동아일보, 1974. 7. 2.). 광고에서는 “선풍적 인기 속에 중판(重版) 또 중판!”이란 헤드라인 밑에 책 제목을 크게 배치하고, “청년문화를 말하기 전에 이 책을 보라!”라는 서브 헤드라인을 덧붙였다. 청년문화를 말하기 전에 우리나라의 노동 현실을 직시하라는 메시지였다.

우울한 표정의 저자 옆모습을 보여주는 사진 왼쪽에는 소설집에 대해 설명하는 카피를 두 문장에 요약했다. “현실의 부조리와 미래에의 꿈을 감동적으로 묘파한 진정한 젊음의 문학적 승리.” “「객지」 「한씨연대기」 「돼지꿈」 「아우를 위하여」 「삼포 가는 길」 등 황석영 문학의 대표작 12편.” 마지막 부분에는 주문이 쇄도해 일부 지방에 배본(配本)이 늦어져 서점에서 못 사신 분들께 사과한다는 사고(社告)도 덧붙였다.

초판이 1974년 3월 15일 발행됐고 석 달이 지난 시점에 중판을 찍었다니, 책값 1,300원의 이 소설집이 얼마나 반응이 좋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창작집에는 「객지」, 「한씨연대기」, 「아우를 위하여」, 「낙타누깔」, 「이웃사람」, 「잡초」, 「돼지꿈」, 「삼포 가는 길」, 「섬섬옥수」, 「장사의 꿈」, 「탑」, 「입석부근」 순으로 중·단편 소설 12편이 수록돼 있다.

「객지」는 89쪽에 이르는 중편 소설이고, 「탑」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고, 「입석부근」(1962)은 19세에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등단작이다. 여러 소설에서는 당대의 설움과 꿈을 첨예한 현실 감각으로 형상화했다. 

표제작 「객지」(1971)는 1960년대 후반에 어느 바닷가 간척공사 현장에서 저임금과 부당한 처우에 시달리던 떠돌이 노동자들이 쟁의를 일으키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1970~1980년대 노동소설의 선구로 평가받는 소설이다. 개성적이고 입체적인 인물 묘사가 탁월했다.

소설의 마무리 대목에서 주인공인 동혁은 알 수 없는 강렬한 희망이 어디선가 솟아올라 자신을 가득 채움을 느끼며 이렇게 말한다.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 비장한 결단을 암시하는 이 말은 미래의 노동운동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읽힌다.

나는 이 소설집에서 「삼포 가는 길」(1973)을 가장 감동적으로 읽었다. 마치 로드 무비(Road Movie) 같은 이 소설에서는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정신적인 고향을 상실한 인물들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내면 풍경을 마치 영상으로 촬영하듯 그려냈다.

출옥한 다음에 고향인 삼포(森浦)를 찾아가는 떠돌이 막노동자 정씨(氏), 공사판을 떠도는 뜨내기 착암기(광산이나 토목 공사에서 바위에 구멍 뚫는 기계) 기술자 영달, 그리고 열여덟에 가출해 4년 동안 군부대 근처의 술집을 전전하다 도망친 작부 백화. 이 세 사람이 우연히 만나 짧게 동행하며 벌어지는 길 위의 이야기다. 서로를 동정하는 세 사람은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객지』에 수록된 여러 소설에서는 산업화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던 인간 군상들의 떠도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굳이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이라 명명하지 않아도 그의 소설들은 현실의 아픔을 날것으로 보여주면서도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슬프고도 아름답다.

창작과비평사 『객지』 초판의 표지(1974)

그의 중단편들은 당대 현실의 부조리를 증언하는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이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문장 구석구석에 가랑비처럼 젖어있는 서정적인 묘사가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황석영의 소설에서는 서정적 울림이 없는 사실주의는 무미건조하고 사실이 배제된 서정은 공허하다는 깨달음을 안겨주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서정성(抒情性)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한국전쟁, 4·19, 베트남전쟁, 5·18 광주민주화 운동, 촛불혁명 같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작가 황석영은 현장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방북, 망명, 구속되기도 하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는데, 절박한 체험은 리얼리즘 소설의 밀도를 높이는데 고스란히 반영됐다.

사석에서 정말 재미있는 그는 백기완 선생과 방배추(본명 방동규) 선생과 묶여 ‘조선의 3대 구라’라는 별칭도 얻었다. 황석영은 능청맞은 구라로 특히 유명했다. 그의 입담은 자신의 한없이 떠돌던 자신의 삶과 무관치 않으리라. 「삼포 가는 길」에서 ‘삼포’란 떠도는 자가 꿈꾸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을 상징하듯, 그의 소설들은 잃어버린 고향(이상향)을 소환하는 서정시 혹은 능청맞은 구라에 가까웠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