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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역사화를 위한 ‘빅히스토리’ 문명사 
인류세 역사화를 위한 ‘빅히스토리’ 문명사 
  • 김기봉
  • 승인 2023.03.21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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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인문학자가 본 인류세

“문명사의 치명적 한계는 인간이 생겨나지 않았던 과거와의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류세의 역사화를 위해선 인류의 과거를 빅히스토리가 연구하는 시공간 범위로 확장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홀로세가 아니라 인류세에 살고 있다.” 오존층 파괴 원인을 규명해 노벨 화학상을 받은 파울 크루첸(1933~2021)이 2000년 멕시코에서 열린 지구환경 관련 국제회의에서 했던 말이다. 대기화학자가 제기한 새로운 지질시대 도래의 주장에 대한 지질학자들 반응은 냉담했다. 지질학적 시대구분은 퇴적암이나 퇴적층에 남아있는 층서학적 증거를 근거로 하는데, 대기화학자가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제비 몇 마리가 날아왔다고 이미 봄이 왔다고 말하는 것처럼 취급됐다. 

하지만 기후위기와 환경재난이 뉴노멀로 자리를 잡으면서, 인류세는 21세기에 출현한 종말론으로 부상했다. 인류세가 인류 생존과 문명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모든 논의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면서, 담론의 주도권은 지질학자들의 손을 떠났다. 그러면서 역전의 경향성도 생겨났다. 국제층서학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n Stratigraphy)는 2019년 인류세 시작을 1950년으로 보는 잠정적 합의를 했고, 새로운 지질시대로의 공인 여부를 내년 초까진 결론 내릴 전망이다. 현 상황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하나의 유령이 전 세계에 떠돌고 있다. 인류세라는 유령이.”

 

우주와 지구 생명 진화를 나선형으로 구현한 이미지다. 빅뱅부터 현재까지 주 목할 사건들이 묘사됐다. 10억년마다 90도 회전돼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인류의 지질학과 역시시대 전개

오늘날 인류세 담론은 인문학과 과학의 지식을 통합하는 융합의 용광로 기능을 한다. ‘지구생활자’로서 인간의 조건을 성찰하고 재규정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그런 효과를 낳는다. 인류세의 특이성은 크루첸이 『네이처』에 게재한 논문 제목처럼 인간이 지구 역사를 바꾸는 행위자가 되는 “인류의 지질학(Geology of mankind)”이란 점이다. 46억 년 지구 역사에서 생명의 출현은 38억 년 전쯤으로 추정한다. 생명 진화의 결정적 순간은 5억4200만 년 전쯤으로 추정하는 캄브리아기 폭발(cambrian explosion)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눈을 비롯한 감각기관이 분화하고 오늘날 지구상 모든 동물 문(animal phyla)의 초기 형태가 출현했다. 그 이전이 생명 진화의 전사(前史)라면, 이후부터가 고생대-중생대-신생대로 구분되는 역사시대가 전개된다. 

생명의 역사시대 주요 사건은 5번의 대멸종 연대기로 기록된다. 빙하기와 간빙기의 주기로 생태환경이 완전히 바뀌는 지구 역사에서 대멸종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최근의 대멸종은 공룡이 1억5천만 년 동안 중생대 주역으로 전성기를 누리다 6천5백만 년 전쯤 운석이 떨어지는 날벼락으로 졸지에 사라진 사건이다. 공룡 멸종은 외부적 요인 때문이지, 자초한 운명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인류세 대멸종은 인간 자신이 “인류의 지질학”이란 비극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지구 역사의 신기원을 창조하는 사건이 될 수 있다. ‘지구 결박자(the Earthbound)’ 인간이 탯줄을 끊으려는 오만에 대한 징벌로 6번째 대멸종이 도래한다는 종말론적 성찰이 인류세의 핵심 주제라면, 그렇게 자초한 실존적 위험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아인슈타인은 운명을 가르는 중대한 문제를 1시간 만에 풀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면, 55분간은 도대체 문제가 뭔지를 이해하는 데 집중하고, 나머지 5분 동안에 답을 찾겠다고 했다. 인류세 문제를 그렇게 접근해야 한다. 인간의 조건과 가치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다. 이는 인간의 과거-현재-미래를 역사화 하는 문제고, 21세기 우리에게 그 과제는 인류세의 역사화로 주어졌다. 

 

대안적 역사로서의 깊은 역사와 빅히스토리

인류세의 기원과 인류세에 인간 정체성, 그리고 인류세 위기 극복을 위해 어떤 문명 전환을 할 것인가? 우리는 일차적으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려는 노력부터 해야 한다. 그런데 길어야 문자 시대 이후 5천 년의 과거를 탐구 대상으로 하는 기존 역사학을 통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지구 역사와 인간 역사를 통합하는 깊은 역사(deep history), 더 나아가 물질적 전환을 통해 모든 것의 기원을 빅뱅까지로 소급해 거의 모든 지식을 연결해 3문제의 답을 추구하는 빅히스토리(big history)가 대안적 역사로 떠오른다. 

우리는 우주 먼지가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점’에 착륙한 덕분에 생겨난 존재고, 지구의 무대에서 온갖 희비극의 역사를 연출하다가 다시 몇 가지 원소로 분해돼 사라진다. 그런 빅히스토리 관점에서 볼 때,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주 먼지로 만들어진 인류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지질시대 창조자로 도약하는 문명을 만들어냈을까? 그 답을 하려면 우주 역사와 인류 문명사를 통합하는 연구가 요청된다. 

문명사의 치명적 한계는 인간이 생겨나지 않았던 과거와의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류세의 역사화를 위해선 인류의 과거를 빅히스토리가 연구하는 시공간 범위로 확장해야 한다. 큰 것은 작은 것을 포괄하기에, 문명사는 빅히스토리 일부분으로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지식을 구성하는 주체는 인간이고, 그런 맥락에서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는 ‘슈뢰딩거 고양이’의 사례와 유사하다. 인간이 우주의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지식이 없었다. 인류세에서 지식의 의미는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 답을 만드는 것에 있다. 필자는 그런 인간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빅히스토리 문명사’ 과목을 만들어 학생들이 살아야 하는 미래 문명의 길을 찾는 내비게이션 역사를 추구한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독일 빌레펠트 대학에서 포스트모던 역사이론으로 박사를 했다. 주요 저서로 『역사학 너머 역사: 빅히스토리, 문명의 길을 묻다』, 『내일을 위한 역사학 강의』, 『팩션 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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