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2-01-25 09:07 (화)
수정궁 - 혹은 자본주의적 안락의 영역과 테러리즘에 의한 위협
수정궁 - 혹은 자본주의적 안락의 영역과 테러리즘에 의한 위협
  • 페터 슬로터다이크
  • 승인 2006.08.21 16: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번역 : 김옥경 숭실대

19세기에 여러 작가들은 위험스러울 정도로 극으로 치닫고 있는 서유럽인들의 공격적인 세계개방을 정체된 동유럽권의 관점에서 비판적인 신중성으로 관망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피오도르 도스토예프스키가 회고컨대 가장 형안을 가진 진단가였다. 1864년에 출판된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현대 증오-심리학(Ressentiment-Psychologie)의 기초를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구화에 대한 적대감(만약 우리가 이 표현을 그 과거에 적용시켜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다면)을 최초로 언표한 글이기도 한데, 그 글은 지구화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세계가 세계로 되어가는 것(Weltwerdung der Welt)을 다음과 같은 탁월한 비유로 요약하고 있다: 나는 서구문명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단어를 “수정궁”(Kristallpalast)이라고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62년 런던 방문 시 (1851년 만국박람회 후에) 시덴햄에 다시 건립된 수정궁(수정궁은 1862년 만국박람회에 다시 장소를 제공함)을 보게 되었는데, 그의 수정궁에 대한 회의적 인상은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1863)에 대한 강연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반감을 연상시킨다. 그가 살던 시대에 유명했던 이 책(단적으로 낙관주의적이며 서구 우호적 경향을 띰)에서 새로운 인간(Neuer Mensch)이 표명되었는데, 그 영향은 레닌에까지 이른다. 이 새로운 인간이란 사회적 문제를 완전히 기술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유리와 금속으로 만들어진 공동체궁전(Gemeinschaftspalast)에서 자신들의 동료들과 살아가는데, 이 공동체궁전은 동과 서(사회주의 제국과 자유주의 제국)의 거주공동체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궁전은 냉방 시설이 갖추어진 호화주택으로 설계되었다. 의견일치가 이루어지는 영원한 봄은 이 큰 온실을 지배하며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이 그 자체로 자명한 것 같기도 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궁전에서의 삶은 서구 인류에 속한 한 집단의 의지를 상징하고 있는데, 이 의지란 다름 아닌 역사이후 시대의 긴장완화 속에서 세계를 네트워크화(Weltvernetzung)하고 세계를 행복한 곳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들 집단이 장악해온 주도권을 완결하려는 의지이다.



여기서부터 "역사의 종말"(Ende der Geschichte)에 대한 동기가 근대라는 시대 전체를 관통하여 이어지게 될 개선행진을 시작한다. 20세기의 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19세기의 이상주의자들은 사회적 삶이 호전적 역사의 도정에서 확장된 내부(erweitertes Interieur), 다시 말해 내부적으로 잘 정돈된 영역에서만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통찰하였다. 사람들이 현실적인 역사(reale Geschichte)를 어떻게 이해하든 상관없이, 현실적인 역사는 마치 그 역사가 사용하던 창살(Speerspitzen)과 항해와 영토확장 전쟁이 표방하듯이 외부로 향한 과업의 대명사로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역사적 투쟁들이 영구평화로 귀결되어야 한다면, 사회적 삶은 총체적으로 하나의 집안 내부(Gehäuse)로 통합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상태에 이르면, 역사적 사건들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 발생하는 사건이란 그저 집안에서 일어나는 불상사(Haushaltsunfälle) 정도일 것이다. 서방세계가 - 특히 2004년 5월에 상대적으로 완결을 이룬 유럽연합 - 본질적으로 오늘날 바로 이 거대한 인테리어(Interieur)를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누가 부인하겠는가?



이 거대한 긴장완화의 온실은 20세기가 소비주의라고 표현하는 유쾌한 바알(Baal)신의 숭배에 바쳐졌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수정궁과 유흥을 즐기는 런던의 군중이 보여주는 충격적인 광경에서 인식했다고 믿었던 자본주의적인 바알 신은 그 집안 내부에서는 물론, 그 집안 내부를 지배하고 있는 쾌락주의적 북새통도 잘 구현해 주고 있다. 여기서 궁극적인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소비의 교리로서 정식화된다. 수정궁이 건립됨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로서 오직 전체 관계의 “수정화”(Kristallisation der Verhältnisse im ganzen)가 초래될 수 있다. 아놀드 겔렌(Arnold Gehlen)은 “수정화”라는 표현을 쓰면서, 도스토예프스키에 의존한다. 이 수정화는 권태(Langeweile)를 일반화하려는 기획(Projekt)을 시사하고 있다. 수정화를 촉진하고 또한 보존하려는 것이 앞으로 모든 국가권력의 목적이 될 것이다. 입헌적으로 보장된 권태는 자연스럽게 기획의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그 권태를 지시해주는 사회 심리적 선율은 동요(Aufbruchstimmung)이며, 그 기본음색은 낙관주의이다. 역사이후 시대(posthistorische)의 세계에서 모든 기호 혹은 징표들(Zeichen)은 미래를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소비자 연합에 부여될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이 미래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약속이란 바로 안락이 종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권은 소비주의의 법적인 하부구조이다.


그러나 수정궁의 오랜 평화는 거주자의 심리적인 표출로 이어진다는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강한 확신이었다. 이 기독교 심리학자는 긴장완화(Entspannung)는 필연적으로 인간 내면에 있는 악을 밖으로 발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원죄였던 것은 보편적인 안락의 풍토 속에서 악을 향한 진부한 자유로 드러난다. 더욱이 그 역사적 변명이나 유용성을 지닌 변형을 결여한 악은 먼저 권태(skuka) 속에서 역사의 종말 이후 그 본질적 형태로 결정화(auskristallisieren)될 수 있다. 소박한 사람들(Naive)에게는 놀랄만한 것이 되겠지만, 모든 변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악은 단순히 일시적 기분(bloße Laune)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자명하다. 이 기분은 심연이 없는 정립 또는 고통을 받고 고통을 주는 임의적인 취향으로서 더 나아가 특정 근거 없이 배회하는 파괴로서 드러난다. 현대적으로 이해된 악은 운동 없는 부정성(arbeitslose Negativität)이며, 이것은 명백하게 역사이후 시대의 상황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이 현대적 악의 대중보급판(Volksausgabe)은 무고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서로를 침대 틀에 묶어 주는 중산층 가정에서의 사도마조키즘(Sadomasochismus)이며, 현대적 악의 호화판은 임의적인 편애함을 선호하는 심미적 속물주의(ästhetischer Snobismus)이다. 가치나 무가치는 모두 근거 없이 이것이나 저것을 평가하는 단순히 일시적 기분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이 이 악을 칸트가 명명한 대로 근본악이라고 부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사실상 사소한 문제이다. 악의 근원이 일상적인 기분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근본적”(radikal)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근본적”이라는 명칭은 존재론적인 연극적 소란스러움일 뿐이다.



여기서 1929년에서 1930년에 형성된 하이데거의 뛰어난 권태의 현상학이 단지 유럽전역에서 형성된 수정궁(전쟁을 통해서 파괴되었다 할지라도)으로부터의 탈출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가? 모든 유효한 확신의 불가피한 부재라는 그 수정궁의 도덕적 내부풍토가 여기가 아닌 어디에서 더 명확하게 파악될 수 있겠는가? 대중문화, 인본주의, 생물학주의는 이 철학자의 통찰에 따르면 수정궁에 살고 있는 현존재의 깊은 권태를 그 배후에 숨기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가면이다. 하이데거의 주제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 우리는 위에 언급한 것들 속에서 역사이후 시대의 세계를 의도적으로 재역사화하려는 하이데거의 시도를 인식해야만 한다. 이 시도는 재앙을 삶의 스승으로 불러올 수 있는 대가를 치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그가 일시적으로 자신을 귀속시킨 “민족 혁명”(nationale Revolution)의 관점에서 오늘 여기서부터 재역사화(Rehistorisierung)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거기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선취하여 사유했다고 말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이데거의 역사주의는, 반성의 중심지 독일에서 출발하여, 역사의 마지막 시간에 다시 한 번 역사를 허용하기 위하여 후기 역사적인 획일성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요청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역사”란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수난을 받는 것이다. 그 철학자에 따르면 독일인들은 마지막 수난의 민족으로서 행진해 나아가야만 하며, 또한 임의성이 지배하는 현장 한 가운데에서 독일인이 위대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요청적인 증거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독일인들에게는 허용되어 있었다. 만일 독일인들이 하이데거가 그들에게 이상적으로 기대했던 것을 수행할 수 있었더라면, 그들은 역사적 필연성의 빛이 마지막으로 바로 그들에게 비추어 질 수 있는 민족이었다는 점을 세계만방에 분명히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상황의 아이러니는 문제의 명증성이 그 장소를 바꾸어 적의 진영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반-파시즘이야말로 그 시대가 도덕적 관점에서 제공해야만 했던 가장 확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명증성은 역사이후 시대의 장을 수정궁으로 기획 수립하고자 했던, “역사”로부터 이주해 나간 전형적인 이주자들인 미국인들과 결탁하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에 있어서 수정궁이라는 비유적 표현이 지니는 역사철학적인 권위는 우리가 그것을 파리의 상점가(Pariser Passage)*에 대한 발터 벤야민 해석과 비교할 때 가장 잘 평가될 수 있다. 우리가 이 두 경우를 비교할 수 있는 까닭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비유와 벤야민의 해석이 모두 자본주의적 세계 상황을 해명하는 열쇠로서 건축학적 형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시적(synchroner)으로 관찰해 보면, 왜 벤야민이 사상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에 뒤지는지가 곧 명확해 진다. 자본주의적인 마야의 현혹으로 이해되는 세계-내-존재에 대한 벤야민의 과도한 연구는 그 대상의 선택으로 인해 그 신빙성을 계속해서 잃게 되었고, 특히 이는 처음부터 시대착오적이었다. 그 연구는 건축학적으로나 경제학적으로나 또한 도시적인 분위기의 측면에서 볼 때, 자본의 해석학이라는 멍에를 모두 짊어지기에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건축유형이었다. 현대적인 돈의 연관관계(Geldzusammenhang)를 드러내 보여주는 모든 표현형태에 속에서, 마치 그 표현양식의 세부장식(Detail) 속에는 사랑의 신이 숨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스피노자주의자들과 바르부르크 사람들이 믿었던 바대로, 악마도 내재하여 숨어 있기나 한 듯이, 벤야민은 소외의 암호체계를 읽어내려고 하였다. 세부장식의 이데올로기(Ideologie des Details)는, 현대 사회의 잘 보이지 않는 악령이 상품의 장식의 형태를 취하며, 더 나아가 상가건축의 눈에 잘 띠지 않는 소용돌이 모양의 장식곡선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가정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이러한 세부장식에 대한 믿음에 따르면서, 벤야민의 연구들은 부자유스런 천재성을 출구가 없는 방향으로 몰아가는 비밀스런 서고작업에 몰두해 있다. 결국 그의 연구들은 세계의 불행에 대한 증거자료들을 모으는 수집가들의 행운을 증거해 줄 뿐이었다.


만일 벤야민의 연구들이 20세기와 21세기 초에 대해서도 계속 글로 쓰여 졌다면, 그리고 우리가 몇 가지 방법적인 수정사항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연구들은 대형 쇼핑센터, 전시 센터, 체육 경기장, 실내 놀이공원, 우주국 또는 격리된 호화로운 공동 주거지역(gated communities)과 같은 현재의 건축학적인 모델들을 표준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러한 모델들은 차라리 수정궁-시설 또는 온실-시설 종국에 가서 아마도 우주국-시설이라는 명칭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논란의 여지없이 둥근 아치형 지붕이 덮인 긴 상점가는 시작하는 소비주의 시대를 암시해주는 공간표상을 구현하고 있었다. 벤야민에게 그렇게 영감을 주었던 것으로서, 공적인 인테리어(öffentliches Interieur)의 형태로 살롱(Salon)과 우주(Universum)를 융합을 시킨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상품자본의 성전”, “상업의 탐욕스러운 거리”였으며, 동양의 바자시장(Bazar)을 시민세계에 투사한 것이었으며, 모든 사물을 구매력의 빛 속에서 변형시킨 것에 대한 상징이었다. 그것은 방문하는 동안 구매자를 매혹하는 동화(feerie)의 무대였다. 그러나 수정궁은, 런던의 경우에는 만국 박람회장이었다가 나중에는 "민중의 교육"(Volksbildung)에 바쳐진 놀이공원이었으며, 더 나아가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에서는 “사회” 전체를 전시장 자체로 만드는 수정궁이 아치형 지붕이 덮여 있는 상가의 건축양식보다 이미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하였다. 벤야민이 이 수정궁울 자주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는 이를 단지 규모가 큰 아치형 지붕이 덮여 있는 긴 상점가로 간주한다. 여기서 벤야민의 이러한 관점은 그의 놀랄만한 골상학적인 안목(시력: Sehkraft)을 취약하게 만들어 버렸다. 왜냐하면 아치형 지붕이 덮여 있는 긴 상가가 자본주의의 정체와 안락함을 시사해 주었던 반면에, 19세기의 가장 거창한 건축형태를 보여주었던 수정궁은 이미 통합적 자본주의(integraler Kapitalismus)를 지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통합적 자본주의에서는 외부세계를 철저히 계산된 내부(durchgerechnetes Innen)로 완벽하게 흡수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만일 우리가 “수정궁”이라는 비유를 현대의 야망의 상징으로 받아들인다면, 자본주의적인 프로그램과 사회주의적인 프로그램 사이의 대칭성(Symmetrie)이 어려움 없이 인식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궁전을 기획하는 두 번째 공사장일 따름이었다. 사회주의 공사가 끝난 이후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로 이미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관점을 통해서 이제 비로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말해질 수 있다. 자본주의는 단순한 생산관계 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세계시장”이라는 사유형태가 표현해낼 수 있는 이상의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발목 잡혀 있는 인간들의 총체적 삶의 연관성을 구매력의 내재성으로 환원시키려는 기획을 함축하고 있다.


자본을 매개로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세계형성(Weltbildung)에 관한한 우리가 단정할 수 있는 사실은, 사물의 실제적인 진행과정이 수정궁의 문화와 현존재에 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상을, 그 작가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확증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구매력의 영역에서 오늘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 간에, 그것은 일반화된 건물내부의 현실성(Indoors-Wirklichkeit)이라는 범위 내에서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예외적인 사건들조차도 이 관찰을 벗어나지 못한다. 뉴욕의 고층건물들도 유리궁 내부에서 파괴되었다. 베를린의 러브-퍼레이드(Love-Parade)도 시대에 맞지 않게 서방에서의 독일의 승리를 알리는 금으로 된 천사의 수호를 받으며 광장(혹은 전시장: Jeu de Paume)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정궁의 유흥(Palast-Amüsement)이다. 항상 깨어 있고 정치적으로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승리의 기념탑(Siegessäule)을 철거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그 사건(Ereignis)은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자본주의적인 세계궁전(Weltpalast)은 - 초후기(Ultraspät) 마르크스주의자들인 네그리(Negri)와 하트(Hardt)가 최근에 이를 제국(Empire)이라는 명칭 하에서 파악하였던 - 어떠한 일관된 건축학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지 않다. 자본주의적인 세계궁전은 저택 정도의 규모라기보다는, 오히려 온실의 특성을 가진 안락함의 시설(Komfort-Installation)이거나, 혹은 침투해 들어와서 거드름을 피우는 식물군락과 속이 꽉 찬 포자낭들, 다시 말해서 대륙 전역에 가지를 뻗어 나가는 식물군락과 포자낭들로 이루어진 뿌리줄기(Rhizom)이다. 만약 우리가 이 세계궁전이 인류를 수적으로 모두 통합시켜 주기를 갈망한다면, 우리는 이 세계궁전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거대한 안락함의 구조(Komfortsstruktur)는 지구 반구의 거주자들을 자신의 구성원으로 만들면서 아마도 상당히 오랫동안 무수히 많은 새로운 시민들을 통합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 구조는 이전의 구성원들을 밖으로 떠밀어내고, 또한 공간적으로는 이 구조 속에 편입되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사회적 배제 즉 안락함의 맥락(Komfortskontext)으로부터 추방하는 방식으로 이 사람들을 위협할 것이다. 이 위협은 그 당사자들에게 하부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비록 실내-우주(Indoors-Universum)로 건축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거대한 온실은 견고한 외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그런 한에 있어서 수정궁조차 어떤 면에서는 시대에 뒤진 상징이다. 오직 예외적인 경우에만 수정궁은,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 그리고 이스라엘과 서요르단 지역 사이의 소위 안전 경계지역에서처럼, 자신의 경계선을 견고한 소재로 유형화한다. 가장 효과적인 경계벽들은 차별을 통해 안락함의 시설을 구축한다. 이 벽들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갈라놓는 재화 획득의 벽들이라, 삶의 기회와 직업선택에 있어서의 극심한 비대칭적 분배에 의해 높게 쌓여진 성벽이기도 하다. 벽 안쪽에서는 구매력을 소유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주 안정적이고 강화되는 안락함 속에서 총체적인 특권에 대한 백일몽을 꾸고 있다. 그 반면에 벽 바깥에서는 다소 망각된 다수가 그들의 전통과 환상 그리고 즉흥시 속에서 생존하고자 노력한다. 긍정적 평가에 의하면 수정궁은 21세기 초에 호모 사피엔스라는 유에 속하는 구성원들의 3분의 1을 포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러나 아마도 4분의 1 혹은 그 보다 더 적은 수였을 것이다 - 인류의 모든 구성원들을 효율적으로 통합하여 공동의 복지체제(Wohlfahrtssystem)로 조직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인권을 담지한 사람들의 집합체로서의 인류라는 의미론적인 (비용이 들지 않는) 구성물은 극복될 수 없는 체제 자체 상의 이유로 말미암아 구매력과 안락함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체를 의미하는 인류 즉 경제적이고 값비싼 구성물로 이행될 수 없다.



전 세계에 걸친 자본주의적인 내부공간(Innenraum)은 (일반적으로 서구 그리고 서구화된 영역으로 지칭되는 공간) 당연히 더 또는 덜 정교하게 다듬어진 건축학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내부공간은 안락함의 통로(Korridoren)들로 얽혀있는 그물망으로서의 땅 위에 솟아 있다. 그런데 이 통로들은 전략적으로 흥미로운 지구표면상의 교차점으로부터 시작하여 밀집된 노동과 소비의 오아시스로 확산되어 있다. (이 오아시스는 일반적으로 개방된 도시와 획일적인 교외(Suburbia)의 형태, 그리고 더 빈번히 지방 거주지, 외진 휴양지, 인터넷 혹은 사이버 주거지(e-villages) 또는 격리된 호화 공동 주거지역(gated communities)의 형태로 지어진다.) 역사적으로 이례적인 대중 유동성(Massenmobilität)의 형태는 반세기 전부터 통로와 연결로 이루어진 내부공간 속에서 확장되어 나간다. 주거와 여행은 거대한 시설 속에서 서로 공생관계를 유지한다. 이러한 현상은 다방면에서 되돌아 온 유목생활(Nomadentum)과 유대적 유산의 현행성 (Aktualität des judischen Erbes)에 대한 시기적절한 담론에 반영되어 있다. 많은 예술가, 전문 아니마터[레크레이션 전문가], 가수, 마사지사 그리고 출장 다니는 사람은 유동적인 삶에로 안내해주는 여행가이드로서 그들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포괄적인 경제 분야인 관광산업이 자본주의적인 삶의 방식(way of life)의 가장 첨단 현상을 드러내 주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여행활동의 대부분이 이제는 조용한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 떠나기 위해 우리는 더 이상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비행기 전복 그리고 선박 난파는 그것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상관없이, 시설[위에 언급한 거대한 시설물. 역자 주]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며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면 즉시 전 세계 미디어 사용자(Weltmedienbenutzer)에게 지방 소식으로서 전달된다. 그 반대로 거대한 시설 밖으로 여행하는 것을 우리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관광(Risikotourismus)으로 당연히 간주한다. 이 위험한 관광을 통해 서구 나라에서 온 여행자는 - 경찰 그리고 외교적 경험이 입증해 주듯이 - 점점 더 빈번히 문명 비판적으로 무장된 납치조직의 사실적(de-facto) 공범자가 되어 버린다.



자본주의적인 세계내부공간은 풍요의 섬들 사이에 있는 통로들로 얽혀있는 격자 모양의 울타리(Gitter)를 형성한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울타리는 인구통계상 실제로 앞으로 다가 올 70억 인구의 3분의 1조차도, 그리고 지리적으로 대륙의 10분의 1조차도 포괄하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해상을 고려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전체 거주 가능한 요트와 유람선을 다 합쳐도 해면 면적의 10만분의 1에도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2004년 1월에 2600명의 승객을 태우고 뉴욕으로 처녀항해를 했던 커나드(Curnard)의 새로운 호화 원양 여객선인 퀸 메리 2호만은 우리가 특별히 언급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떠돌아다니는 수정궁으로서의 호화 유람선은 얼마나 포스트모던적인 자본주의(postmoderner Kapitalismus)가 자기표현 능력을 결여하고 있지 않은지를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발적으로 보일 만큼 큰 이 배는, 적어도 이 예술품이 광범위하게 사물들의 위상을 통합적인 상징의 힘에 의존하여 요약하고 있는 한, 21세기가 시작하는 무렵에 제작된 가장 설득력 있는 예술품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지구화된 세계”(globalisierte Welt)라는 표현이 다루어지게 될 때, 그러한 표현이 사태의 본질상 핵심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이러한 공간의 부분(Raumsegment)만을 겨냥하고 있다. 지구화(Globalisierung)라는 당당한 수사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기자 명단에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계체제가 본질적으로 모두를 포괄하는(all-inklusiv)듯한 거짓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정작 지구화를 언급하는 사람은 빈곤의 바다에 떠 있는 안락한 섬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체제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필연적 근거들 때문에, 세계체제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할 수 없다. 배척(Exklusivität)은 수정궁의 기획 자체에 내재적인 것이다. 자기 탐닉에 빠져 있고 안정된 호화스러움 위에 건립된 각각의 내부영역(Endosphäre)은 매우 의심스러운 건축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외부의 반응이 단지 연기되고 있을 뿐 지속적으로는 저지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그 건축구조의 존립은 부담스러운 바깥 그리고 과도기적으로는 다소 무시될 수도 있는 바깥을 전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지구화된 세계”라는 표현은 단적으로 역동적이면서 거대한 시설물(Installation)을 의미하는데, 이 시설물은 구매력을 소유한 인류분파들에게 "생활세계"의 껍데기(Lebenswelt-Hülle)로서의 기능을 해준다. 그 내부에서는 마치 행복한 소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복권운이 엔트로피에 역행하면서 끊임없이 계속될 수 있기나 한 듯이, 사람들이 견고한 불확실성이라는 항상 새로운 고지를 향해 오르고 있다. 지구화에 대한 논쟁은 그렇기 때문에 단적으로 풍요롭고 안락한 영역(Wohlstandszonen)의 독백으로 진행되어 왔다. 거대한 시설물의 위협적일 만큼 큰 규모는 모종의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낭만이 활기를 띠게 한다 - 큰 항공사의 기내 잡지는 (우리가 여기서 남성전용 출판물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낭만을 대표해주는 미디어에 속한다. 세계시민주의(Kosmopolitismus)는 부에 잘못 길들여진 사람들의 지역주의(Provinzialismus)로 일컬어질 수 있다. 사람들은 이를 “여행 특별구역”(Parochialismus auf Reisen)이라고 지칭한다. 이는 자본주의적인 세계내부 공간에서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에 개방되어 있는 세계시민주의의 분위기를 드러낸다.

*

이룩된 지구화(Globalität)의 징표는 가까이 다가온 수많은 모든 타자들과 강제적으로 이웃이 되어야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밀도(Dichte) 혹은 밀집이라는 위상수학적인(topologisch) 용어로 가장 잘 규정될 수 있다. 밀도는 규정되지 않은 무수한 분자들과 운동중심 사이에서 발생하는 공존에의 압력(Koexistenzdruck)의 정도를 표현한다. 밀도라는 개념을 통해, 현대의 도덕주의자들이 타인에 대한 주체의 개방성을 설명하고자 했던 근접성(Nähe)에 대한 낭만주의는 극복된다.


가중된 밀도란 행위자들이 만날 수 있는 확률성이, 이것이 상호활동성의 의미에서 이건 아니면 충돌이나 거의 충돌에 가까운 마주침이건 간에, 어쨌든 만날 수 있는 확률성이 증가됨을 의미한다. 밀집된 관계가 지배적인 곳에서는 행위 주체자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거나 일방적인 명령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높은 밀도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주위세계의 저항 때문에 일방적인 확장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저항을 사람들은 인식적 관점에서 학습과정을 위한 고무적인 분위기로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충분히 강한 행위자들이 밀집된 환경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현명하고 협동적이며 또한 친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자연스럽게 서로를 사소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들은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저마다 성공적으로 상대방을 견제하여 또한 서로의 이해관계를 계산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이득분배를 생각하고서만 협동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호성의 게임의 규칙들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다는 전제를 밝힌다.


밀도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 억제 혹은 자제(Gehemmtheit)는 우리의 제 이의 본성이 된다. 일단 밀도가 발생해 있다면, 일방적인 선제공격은 어떠한 실천에도 상응될 수 없는 유토피아로 나타난다. 이제 행위의 자유는 공격이 효과가 있었을 시대에 나온 동화의 주제나 다름없다. 일방적인 확장(Expansion)이 관찰되는 곳은 그 곳이 아직 밀도가 희박한 관계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밀도가 의미하는 바는 일방적으로 억제되지 않은 행위가 성공하는 단계가 근본적으로 종식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강렬한 반격이 일어날 가능성은 배제될 수 없다. 행위자들은 이제 일방적인 자들에게만 구원이 약속되었던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



만일 원거리 통신(Telekommunikation)이 고도로 존재론적인 진지함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 개념이 밀집화(Verdichtung)되는 과정의 형태를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원거리 통신은 세계형태(Weltform)를 산출하는데, 여기서 1분당 1,000만 개의 전자우편과 매일 10억 달러 상당의 전자화폐 거래가 실행된다. 그런데 “원거리 통신”이라는 표현이 상당히 명시적으로 상호 제어를 통한 협력을 기초로 한 세계의 상호 연관관계를 산출해 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이 표현이 적절하게 이해된 것은 아니다. 이 표현은 모든 원거리상거래, 원거리 강압, 원거리 충돌 그리고 원거리 원조를 포함한다. 원거리 통신이라는 이 강력한 개념이 원거리 활동(actio in distans)이라는 자본주의적인 형태를 의미할 때에는, 이 개념이 확장된 유리궁(Glaspalast)에서의 현존재의 양태와 활동상태(Tonus)를 기술하는데 적합하다. 원거리 통신 덕택에, 그 속에서 자제가 자유분방함 속에서 자랄 수 있는 그런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도덕주의자들의 오랜 꿈이 기술적으로(technisch)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란 것은 - 에른스트 불로흐가 용서해주길 바라건대 - 어떤 원칙이 아니라 다만 나타난 효과(Effekt)일 뿐이다. 경우에 따라 그리고 과정의 이론에 따라 희망을 갖게 해 주는 것은 다음의 2가지로 파악된다. 첫째, 인간은 때에 따라 미시 영역에 있어서나 거대 척도에 있어서나 어떤 모델에서 이것의 적용으로 이행될 때 삶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이따금씩 거기서 역효과가 별로 없는 좋은 착상들이 나올 수가 있다. 둘째, 실현하고자 하는 착상들의 홍수 속에서, 충분한 밀도의 조건 하에, 모두를 위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다수를 위해 더 나은 것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실현가능한 나머지가 걸러진다는 관찰이다. 밀도의 이성(Dichtvernunft)은 7의 계열(Sequenz von Sieben)의 효과를 내는데, 이 계열은 일방적인 공격성과 직접적으로 해로운 혁신 (이를테면 오직 일회적 또는 짧은 시리즈의 형태로만 가능한 범죄의 유형처럼)을 제거하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한다면, 밀도의 이성의 효력발생 양태를 의사소통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단 우리가 서로 상대방의 활동영역을 빼앗는 것을 의사소통이라고 불러도 좋다는 제한적 의미맥락에서만 우리는 그것을 의사소통적이라 부를 수 있다. 오인된 상태에서 의사소통능력이라고 불렸던 환영으로부터, 안개가 걷히고 난 후에는 상호적인 자제능력(reziproke Hemmungsvermögen)이 남게 된다. 이성적인 사람들이 매우 자랑하는 의견일치란 일방적인 행위들을 서로 견제하는 능력의 표면(Oberfläche)일 뿐이다. 도덕적으로 매우 높게 평가되는 현상인 인정(Anerkennen)은 그 본질에 있어서 오히려 낯선 주도권을 잠재적으로 혹은 실제적으로 제어하는 자로 스스로를 주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위르겐 하버마스의 업적은 “타자를 고려한다는 것”(Einbeziehung des Anderen)을 상호간에 제어하는 메커니즘의 효력영역을 확장하는 절차로서 인식했다는 점이다. 비록 그가 이 과정을 이상적으로 과대평가하고 또한 대화법적으로 잘못 해석했지만 말이다. 하버마스의 생각과는 반대로 “타자를 고려”한다는 것은 오히려 행위 일반을 배제시키려는 포스트모던적인 경향의 흔적이다. 자제되지 않는 일방적인 행위가 환영하기도 어렵고 참아내기도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한편 그러한 측면의 좋은 측면도 함께 여과되어나가 상실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려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사실상 상호 자제를 이룩해 나가는 것은 효과적인 문명화의 메커니즘으로 칭송될 만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범죄(Kriminalität)의 지구화[세계화]는 역사 이후적 시대 상황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준다.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진행 중인 자유분방함이 언제나 다시금 자제기제(hemmende Instanzen)를 제치고 지역적인 우월성을 쟁취하고자 노력하는지를 시사해준다. 조직화된 범죄는 전문화된 자유분방함을 위해 추후로 개선하는 것인데, 이는 제약받는 상황의 틈 속에서 지속적으로 조용히 활동한다. 그 사이 자발적인 범죄는 법조인들의 어려운 전문용어에 따르면 확고히 범인으로 일컬어지는, 혼란에 빠진 개인들이 과도기적으로 자기통제(Selbstkontrolle) 능력을 상실한 것을 증거해 준다. 지속되는 범죄는 근본적으로 둔화되지 않는 끈질긴 타성과 결탁한 채, (시장과 법률의) 허점을 노린다. 끈질긴 범리성을 통해 범죄자의 범죄내용이 여전히 철학적으로 의미심장한 의미를 갖게 된다. 성공적으로 조직화된 범죄자들은 그 조직의 희생자가 아니라 보편적인 자제연관(Hemmungszusammenhang: 행위를 서로 자제하게 하는 행위자들의 연관성. 역자 주)에 대항하여 행위의 자유를 증거하는 중요한 증인이다.



[범죄의 세계화에 대한] 이러한 진단은 특히 최근에 등장한 소위 “세계적인 테러리즘”(globaler Terrorismus)에도 해당 사항이 있다. 지금까지 세계적인 테러리즘에 대한 뛰어난 세부적인 분석들은 제시되고 있지만, 만족할 만한 설명은 아직까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우선 세계적 테러리즘이 가장 강력하게 표출된 경우들, 특히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났던 믿기 어려울 만큼의 단순한 행위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면, 이론적으로 타당할 것이다. 즉 어떻게 반-서구 진영 출신의 능동적인 패배자들이 역사 이후적(posthistorisch) 컨택스트에서 “자유분방함”의 모티브를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었나를 입증해 주는 것이 2001년 9월 11일 테러라고 말이다. 이것은 악이 맨하탄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패배자들의 새로운 물결이 자기 자신들만을 위한 일면성(Einseitigkeit)의 희열을 - 불쾌하게도 정규 경기시간 종료 후에 그리고 역사이후 시대의 금욕규칙들을 어기면서 - 발견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들은 이전의 패배자들이 해 왔었던 방식으로 특정한 “혁명” 하나를 본보기로 삼아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유럽적 세력 확장의 근원적 계기를 모방한다. 이 계기란 다시 말하자면, 선제공격을 통해 그리고 순전한 공격이 허용하는 쾌락적인(euphorisierend) 비대칭을 통해, 그리고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사람들에 앞서서 자신의 기호를 표시하는 사람이 얻게 되는, 꺾일 수 없는 우세함을 통해 자신의 무기력함을 지양하는 것이다. 공격적인 힘의 확실한 우위는 새로이 세계에 해를 끼치는데, 이 번에는 그러나 다른 편, 즉 비-서구권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사물과 영토가 분배된 세계를 다시 정복하려는 것은 너무 늦었기 때문에, 그들은 광범위하게 열려있는 세계 뉴스의 중심지에서 더 큰 영토를 점령한다. 여기서 그들은 그들의 화력무기를 겨냥하는데, 이것은 포르투칼인들이 언젠가 그들이 상륙하던 지역에 석재문장(Steinwappen)을 배치했던 것과 유사하다.


상황이 테러리스트들과 공조하고 있다. 여타의 어떤 생산사회들 보다도 테러리스트들은, 통신사의 전선을 장악하고 있는 주인이 방송 스튜디오 안에서 모든 방송내용을 만들어낼 수 없으며, 외부의 사건들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테러리스트들은 그 사이에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고 있다: 그들 스스로가 그러한 사건들을 제공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방송] 내용의 제공자(content provider)로서 실제 폭력의 영역을 거의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도 확신하고 있다: 거대한 장치 혹은 건축물의 정보공간은 무정형적인(amorph) 아프리카가 19세기에 유럽인들의 극도로 잔인한 공격에 노출되었던 것처럼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대책 없이] 침략적인 행위에 노출되어 있다. 테러리스트들은 사악하게 즐기면서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수정궁 거주자들의 신경체계는 침략자들에 의해 별 어려움 없이 점령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거주자들은 항상 수정궁에서의 권태에 사로잡힌 채 외부로부터의 소식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별로 하는 일 없이 편집증을 앓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들은 외부의 적의 존재를 확증할 수 있는 어떤 임의적인 신호들을 탐지하려고 애를 쓴다. 이와 같이 유사(quasi) 이론적인 통찰들의 총합은 테러주의자들로 하여금 일관된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 만일 그들이 방송에 적합한 폭파작업을 준비한다면, 그들은 그들의 확실한 직관에 따라 서구적 사회 공간(Sozialraum)의 초의사소통적인(hyperkommunikative) 방식을 이용한다. 그들은 -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 경락을 자극하면서, 최소한의 침략으로 전체 [통신] 체계에 영향을 미친다. 테러리스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해도 좋다: 유일하게 효과적인 반-테러 정책은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대해 통신매체들이 빈틈없이 침묵하지 못하게 만들고, 정보를 전달해야 할 통신매체들의 의무를 충실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자극을 전달하는 “우리들의” 통신망은 국부적으로 표출되는 테러를 거의 자동적으로, 끔찍한 사건을 소비하는 사람들 즉 수정궁 안에 사는 성숙한 시민들에게 전달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신경경로가 화상에 의한 통증을 손가락 끝에서 뇌의 중앙 감지체계로 전달하는 것과 유사하다. 사건을 보도해야 된다는 [통신사들의] 강박증은 테러리스트들로 하여금 자신들에 대해 언급되어지게 만드는 기술을 예측할 수 없는 기간 동안 보장해 준다. 이러한 까닭에 테러집단의 지도자들은 과거의 모든 정복자들처럼 성공을 진리와 동일시한다. 그것이 부조리하건 그렇지 않던, 그 결과로 사람들은 실제로 테러 사건들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사람들은 날씨나 여자들의 비밀과 테러를 거의 같은 선상에 놓고 일관성 있게 이야기를 한다. 거의 현실화되지(materialisiert) 않는 환영(Phantom)의 차원에서, 테러는 오직, 여타의 경우에는, 실존적인 것에만 부과되는 존재론적인 모습을 향유한다. 치명적인 테러 공격의 주도자들이 서구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진정한 영웅들로 간주된다는 사실은 테러가 성취하는 성공의 부가적 측면으로 보인다.



테러리즘은 역사이후 시대의 대륙에서 일방적인 세력 확장의 전략으로서 “주의”(Aufmerksamkeit)를 환기시켰다. 테러리즘은 경솔한 “대중”의 뇌리를 관통했고, 주제에 예민하게 자극받는 세계 시장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가 충분히 냉철하게 분석하였듯이, 테러리즘은 포스트모던적 미디어 기술들과 계보적으로 상당히 가까운데, 아마도 테러리즘은 낭만주의적으로 의미가 범람하는 예술의 전통으로부터 비롯된 극단적인 귀결일 것이다. 이러한 예술의 전통의 경우에는, 예술적인 과정을 공격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의미를 강요(Bedeutungserzwingung)해 내었다. 20세기가 흐르면서 그러한 예술의 발전은 의미범람(Transgression)이 작품의 형이상학적이고 예술적인 위대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효율적이고 단순한 마케팅의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인식시켜주었다. 뉴욕 드라마 작가들에 대항하여 시기심을 표현함으로써 유명해진 스톡하우젠(Stockhausen)의 경우는 9월 테러를 다루는 문학 산업 보다 더 많은 진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us)와 테러리즘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공속적인지가 밝혀진다. 이 두 면에서 우리는 가장 명확하게 표현된 텍스트를 읽어 낸다:



“결단을 한 자들에게 역사는 종식되지 않는다. 서슴지 않고 공격할 수 있는 자들에게 [공격의] 일방성은 아직도 효과가 있는 것이다. 선택된 자들은 아직도 세계를 주인 없는 재물로서 간주해도 무방하며, 순전히 공격을 위한 공격을 목격한 자들은 아직도 그들의 칼끝에서 전리품을 취할 수 있다. 진격하는 자유는 진리의 본질이다.”


우리는 이것이 사이렌의 노래*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를 듣는 모든 사람들을 동여맬 돛대들이 충분히 있지 않다. 행위를 자제시키는 이러한 노래는 철철 넘치는 힘을, 어떤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건 아니면 보복을 하기 위해서이건 어쨌든, 발산하려는 힘 센 사람들에게는 바람직한 것이다.


선의를 가진 사람들의 연합단체가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en)의 공격”이라고 부르는 연극은 단지 피상적으로만 세계무대에서 공연될 수 있다. 그리고 사실상 동요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공격의 근본주의(Fundamentalismus)이다. 이것이 지나간 시대에 속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의 잔재는 후기-일방적(post-unilaterale) 세계에서 독성을 지닌 채 남아 있다. 결단을 내린 공격자들을 - 그들이 암살자건 투기꾼이건 범죄자이건 사업가이건 혹은 선택된 자이건 상관없이 - 움직이는 추동력은, 주도권(Initiative)을 무력화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동원하는 세계현실에서, 자기 자신을 순전한 주도권의 빛으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이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급진주의는 믿을 수 없는 것을 유일하게 믿을 만한 것으로 현현시키는, 현대(Modernen)의 검증된 수단이다. 그러므로 거대한 체계에 대항하여 일어나고 있는 오늘날의 테러행위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사실은, 급진주의가 역사이후 시대적 급진주의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검은 백조 종(Spezies)을 발견해 내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역사이후 시대의 순교자로 간주될 수 있는 신자유주의자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능동적으로 비대칭적인 삶이 가져다주는 허구적인 기쁨이 존재론적으로 절대왕정(ancien regime)이라는 구체제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려면, 아직도 실망스런 사건을 많이 겪어야 할 것이다. 그 때 가서 과연 검은 백조들이 다시 흰 백조가 될지는 기다려 봐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과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행위유형은 진정한 의미에서 시대착오적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유형은 1492년 이후 탐욕스럽게 금을 찾아 다녔던 항해자들처럼 아직도 이리 저리 항해하고자 하며,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유형은 7세기에 유일신론으로 불타오르던 사막 종족처럼 말을 타고 돌진하려는 꿈을 꾸고 있다. 두 유형은 그러나 그들의 시대적 상황을 조종하면서, 그들은 현대의 네트워크(moderne Netze)를 그들의 절호의 기회로 느끼고 있을 뿐, 저지된 상황들의 총체로 느끼지 않고 있다는 듯이 기만적으로 자신들을 과시한다. 그들의 시대에 뒤떨어진 행위 철학에 의존하면서 그들은 21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공격성의 낭만주의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관점들을 제시한다. 이러한 낭만주의는 틈새(Lücke)를 자유로운 장(freies Feld)과 혼동하고 있다. 그 행위자들은, 동서양에서 이미 친절, 자제, 상호작용 그리고 협동이 우선하는 시대에, 임무와 기획 그리고 허구적인 쾌감을 야기시키는 선제 공격성(Erstschlagcharakter)의 또 다른 제스처들을 표출함으로써 강한 불균형을 회복하고자 한다. 물론 친절, 자제, 상호작용, 그리고 협동 같은 미덕은, 체계 자체의 본성에 의해 조건 지워진 좁은 틈새이지만 수적으로 많은 틈새들에서는 작용하지 않는다.


행위이론적인 시각에서 “역사적 실존”은 행동공간(Aktionsraum)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공간에서는 내적으로 넘치는 힘을 외부로 표출하고(Ausagieren), 세계사를 만드는 행위가 결국에는 항상 같은 목표를 지향한다. 호언장담하고 또 자폐 경향을 보이는 콜럼부스는 진정한 역사의 영웅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드러내 보여 주었다. 콜럼부스는, 그의 공격행위에 자극을 받은 수많은 행위자들과 마찬가지로, 보편(Allgemeine)에 대한 노이로제 증상을 보인다. 그런 종류의 “역사”에 따르면, 역사가 끝났는데도 역사가 끝났다는 사실을 통찰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오로지 “역사” 만들기가 시도된다. 그런 부류의 “역사” 만들기는 세계무대에서 해소되지 않는 - 그러나 소란스러운 미디어들의 반향과 더불어 - 자폐증을 산출해낸다. 9월 11일은, 많은 사람들이 충격 속에서 이 날을 하나의 역사기호 혹은 징표(Geschichtszeichen)로 간주하려고 할지라도 이 날은, 완성된 역사이후성(Nachgeschichtlichkeit)을 입증해 주는 지금까지의 단서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명백한 단서이다. 이 날은 이 날에 무엇인가가 일어났다는 사실 외에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 암울하고도 불필요한 날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이 9월의 범죄자들은 재발에 대한 막연한 암시 이외에는, 하나의 계획(Projekt)에 합당한 어떤 [내용적인] 것도 숨기고 있지 (in petto) 않은 일방적인 폭력을 증거해 주고 있다. 형편없는 전략가들은 9월 테러가 주는 암시를 협박으로 오해한다. 진정한 위협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무장한 충고”(bewaffneter Ratschlag)의 형식을 취한다. 그러나 9월의 이 행위는 어떤 제안을 한 것이 아니라 수정궁을 정확히 공격할 수 있다는 능력을 단순히 과시한 것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 행위는 행위를 실행했다는 사태 자체만으로 자신이 의도한 바를 다 소진해버리는 “행동방책”(Maßnahme)이다. 또한 이 행위는 19세기 이래로 혁명적 메타 윤리학이 가르쳤던 바와 같은, 즉 유감스럽지만 필요악적인 수단을 써서라도 선한 최종목적을 추구한다는, 그런 자세도 시사해주지 않는다. [9월의] 암살행위는, 서로 자제하고 상호 피드백(Rückkopplungen)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의 한 가운데에서, 순전히 [공격을 위한] 공격의 우선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9월 11일을 통해 우리는 역사이후 시대의 내용이, 그 극적인 측면만 가늠해 보자면, 앞으로 예측할 수 없는 기간 동안 통찰력이 없는 자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규정될 것이라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여느 것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러한 예측 역시 어떤 확실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일찍이 헤겔이 역사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지만, 이제 [우리의 경우에는] 역사 이후 시대의 에피소드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오직 안보기술(Sicherheitstechnologie)의 제공자들만이 역사이후 시대의 돌발 사건들로부터 어떤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공적인 스트레스를 자신들의 세력 확장의 계기로 삼는 국제경찰들의 분주함까지도 고려하는 통신사들의 흥분의 높낮이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 사건들과 제스처들을 둘러싸고 뜨거운 화젯거리가 언급된다. 거대한 유리궁의 고객들은 내용이 없는 돌발 사건들과 지시대상이 없는 제스처들을 끊임없이 연속해서 경험한다. 그러나 통신사의 뉴스나 보도되는 사건내용은, 실제로 일어나는 폭력행위와 “사건 현장으로부터”(vor Ort) 직접 유래하는 드라마는 - 사고 현장이라든가 사건발생 현장이라는 오늘날의 전문용어가 잘 말해주듯이- [수정궁이라는] 밀집된 공간에서 정규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일의 표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잔잔한 파문에 불과할 뿐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테러주의자들의 기이한 행위가 서구의 정치적 문화로 하여금 “홉스적인 계기”(hobbesianisches Moment)에로 회귀하게끔 하는 충분한 근거들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현대 국가가 시민들의 생명을 충분히 지켜줄 능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다시 제기한다는 것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는 사태 자체를 통해서 명백하게 긍정적으로 대답될 수 있다. 이리 오래전부터, 테러를 심리적으로 감당하여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소위 “사회”라는 것에로 이행되었다. 마치 테러리스트들의 당혹스런 행위가 국가차원의 동원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사회”의 대중매체를 통해서만 수신자에게 전달된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의 국가는 여타의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테러의 소비자이며, 국가가 테러와의 전쟁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은 국가가 공격받을 수도 없고 직접 대응할 수도 없다는 사태를 피해갈 수 없다. 어차피 국가의 존립근거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더 이상 홉스적인 [국가의] 기능으로부터 도출되지 않고 있다. 국가의 존립근거는 삶의 기회와 안락함의 획득을 재분배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 의해서 정당화되고 있다. 국가는 자신의 유용성을 허구적인 종합치료사(Gesamtterapeut)로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물질적 ․ 허구적 사치를 보장해주는 보증인으로서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테러에 대해 너그럽게 대응하는 태도는 적절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너그러운 대응 태도는 공격자들보다 훨씬 우세한 피공격자의 우월성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피공격자들은 안개에 싸여있는 알 카이다를, 즉 증오와 실업 그리고 코란 구절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집단인 알 카이다를 독특한 스타일을 갖고 있는 전체주의(Totalitarismus)로 부풀려 과대평가한다. 많은 사람들은 더 나아가서 어떠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인지는 모르지만, 전체 자유세계를 위협하는 “이슬람 파시즘”까지도 엿볼 수 있다고 억측한다. 알 카이다에게서 어떤 근거로부터 이러한 은폐와 부풀린 과대평가가 야기되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열려있다. 단지 확실한 것은 현실주의자들은 드디어 새롭게 자기 자신들을 시종일관성이 없는 이들의 지도자로 자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안보를 핑계 삼아 새로운 투쟁가의 대변인들은, 그 근원이 의심의 여지없이 다른 곳에서 찾아져야만 할 권위주의적인 경향을 해소한다. 집단의 중앙부에서 세심하게 유지된 공포분위기는 잘 못 길들여진 서구의 안보 소비자들의 대다수가 피할 수 없는 코미디를 받아들이게끔 배려한다. 9월 11일 이후 유럽 공항에서 비행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자신들의 손가방에 손톱가위를 넣기를 단념하는 여행자들은, 도대체 이 모든 사태가 어떻게 진전될지에 대해서 약간의 감을 잡고 있을 뿐이다.

출처: 한국철학회 홈페이지(http://www.hanchul.org)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