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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57] 비혼과 저출산의 또 다른 이유
[한민의 문화등반 57] 비혼과 저출산의 또 다른 이유
  • 한민
  • 승인 2023.04.26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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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57

 

한민 문화심리학자

비혼과 저출산의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개인주의화’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개인주의라는 개념이 익숙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시 말해, 개인주의화된 젊은이들이 자기들만 즐기려고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개인주의는 삶의 중심이 개인, 즉 자기 자신이 되는 문화를 말한다. 비교문화심리학에서는 농경에 비해 유목이나 상업이 중시되어온 서양에서 집단의 힘보다는 개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문화가 발달했다고 본다. 

그러나 사실 개인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서양에서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 시기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생존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서양사람들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 지역의 영주에, 조합에, 공동체에 의존하고 협조해야 했다. 

사회과학에서는 중세와 근대를 구분짓는 사건으로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꼽는다. 산업혁명의 의미는 자연에 의존하던 인간의 생산력이 기계로 이동했다는 점이며, 시민혁명은 세상을 지배하던 권력이 신의 권위를 부여받은 왕과 귀족들에서 시민으로 이동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행위의 주체가 인간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근대를 규정하는 가장 큰 기준이다.

물론 이 전환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자연과 사회를 통제할 수 있다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믿음은 국가주의 등 전체주의적 사상으로 이어졌고, 끝없는 경쟁은 전쟁으로 이어져 개인의 삶이 오히려 사라지는 시대를 맞게 되었다. 게르만 민족의 중흥이나 대동아 공영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체제 경쟁 등이 이 시대의 산물이다.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기를 원하는 개인들이 등장하면서 이 시대가 마무리된다. 신이나 자연, 국가와 사상이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닌, 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를 규정한다는 생각이다. 현대적 의미의 개인주의는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한국은 이같은 과정을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겪어야 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 이후에도 그런 상황은 이어졌다. 분단과 전쟁, 군사 독재와 민주화 투쟁 등 한국인들은 민족의 독립 이후에도 국가의 수호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 경제발전과 선진화, 반독재와 민주화 등의 거대한 가치를 위해 살아왔다. 

한국에서 개인의 삶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한 것은 경제적으로도 체제적으로도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였다. X세대 젊은이들의 개인주의가 잠깐 주목받았지만 곧이어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곧 국난 극복이 키워드가 되고 말았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일상화된 시대를 살며 틈틈이 미완의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일까지… 한국의 현대사에서 개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국가와 사회, 회사와 가정을 위해 살면서 우리는 ‘나만의 삶’을 꿈꾼다. 그러나 개인으로 산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개인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유지해야 하고 삶의 의미 또한 찾아야 한다. 신의 뜻과 왕의 명령을 따르면 되었던 과거에는 없었던 종류의 어려움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고 했으며, 그 결과 자유로부터 도피(에리히 프롬)하기에 이르렀다. 

현대 한국의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이유는 스스로의 선택에 신중하겠다는 것이다. 개인의 삶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내 선택으로 인해 태어날 또 다른 생명이 힘든 삶을 살아가도록 하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충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짓는 주체로서의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즉, 지금 한국의 비혼과 저출산은 현대적 자기(self)의 성장과 관계된 현상이다. 

제 삶의 주체로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체주의 시대가 마무리된 1960년대의 서구 젊은이들이 신비주의와 마약에 눈을 돌린 것은 살아야 할 의미를 찾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었다. 한국에서도 문제가 되고있는 사이비 종교와 마약의 근본적 원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주체로 서기 원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좋은 신호다. 예정된 혼란을 딛고 한 차원 성숙한 개인과 사회가 되길 바랄 뿐이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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