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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분단의 상처를 하루빨리 아물게 해야
민족 분단의 상처를 하루빨리 아물게 해야
  • 김병희
  • 승인 2023.05.04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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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21 조정래의 『태백산맥』

열 권짜리 대하소설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된다.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그믐달이 서편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밤마다 스스로의 몸을 조금씩 조금씩 깎아내고 있는 그믐 달빛은 스산하게 흐렸다.”

소설 『태백산맥』에서는 1945년의 광복 직후부터 1953년의 휴전 협정까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서 벌어진 사건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조명했다. 1983년 9월부터 <현대문학>에 소설이 연재된 이후, 1986년 이후 한길사에서 『태백산맥』 10권을 펴냈고, 나중에 해냄출판사에서 다시 출간했다. 그동안 200쇄 이상을 인쇄해 470만 세트 1,300만 부가 팔렸다니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아닐 수 없다. 

한길사의 『태백산맥』 광고 (한겨레, 1989. 10. 31.)

한길사의 ‘태백산맥’ 광고를 보자(한겨레, 1989. 10. 31.). 도치법을 써서 “보아라, 우리문학 여기까지 왔다”라는 헤드라인을 쓴 다음, 그 아래에 “태백산맥(太白山脈)”이란 제목을 굵게 강조했다.

이어서 “민족문학의 최대걸작 6년 만에 드디어 완간!”이란 서브 헤드라인을 붙이고 작가의 사진을 제시했다. “한국현대사의 새로운 지평을 활짝 연 80년대에/ 우리는 민족통일문학사에 우뚝 솟은/ ‘태백산맥’을 탄생시켰다.” “우리는 소설 ‘태백산맥’을 통해/ 역사와 사회과학이 말하지 못하는 진실을 만난다.” 이런 카피는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지면 중앙에는 1980년대에 민중 미술로 이름을 떨친 판화가 이철수 화백의 태백산맥 판화를 배치했다. 지면 오른쪽에는 “아직까지 그 어떤 소설도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 의해 평가받은 바 없다”고 강조하며 추천자 13명의 평가 내용을 나열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태백산맥’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민중사의 처절한 대실록”이라고 평가했고, 서울대의 김윤식 교수는 “우리 문학이 ‘태백산맥’을 창출해내기까지에는 해방 후 40년이란 세월이 필요하였다”라고 평가했다. 이어서 언론인 송건호, 문학평론가 전영태, 이동하, 홍정선, 권영민, 이재현, 김철, 경제학자 박현채, 역사학자 강만길, 시인 고은, 한국현대사학자 김남식의 평가를 소개했다. 

여러 평가 중에서 “이 작품의 진정한 작가는 사람다운 삶의 실현을 위해 싸우다 쓰러져간 이름 없는 숱한 영혼들, 바로 그들이다”라는 문학평론가 김철의 평가가 특히 인상적이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쓰러져간 이름 없는 숱한 영혼들이 조정래 작가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했다는 뜻인데, 소설이란 작가 혼자만의 창작물이 아닌 사회적 산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표명한 진술이었다.

한길사 『태백산맥』 10권 세트 (1986-1989)

『태백산맥』은 제1권 ‘한의 모닥불’을 1986년 10월 5일에 출간하고, 제10권 ‘전쟁과 분단’을 1989년 10월 23일에 출간함으로써 모두 10권이 완간됐다. 책값도 권마다 3,000원에서 4,300원으로 차이가 있었다.  

이 소설은 250여 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민족 분단의 표면과 이면을 때로는 망원경을 통해, 때로는 현미경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긴긴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시대의 아픔을 읽었을 테고, 어떤 장면에서는 충격을 먹거나 어떤 순간에는 깊은 슬픔에 빠졌으리라.

어떤 독자들은 벌교 일대를 장악한 깡패 염상구가 남편의 빨치산 활동으로 고생하는 외서댁을 겁탈하고 나서, 그 느낌을 “쫄깃쫄깃한 것이 꼭 겨울 꼬막 맛”이라고 말했던 대목만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사람마다 어떻게 기억하든 이 소설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사라질 뻔한 빨치산의 활동을 생생히 묘사하며, 민족 분단의 상처를 하루빨리 아물게 해야 한다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소설 『태백산맥』에 지리산은 등장하지만 태백산맥은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는 민족의 끊겨진 등뼈를 다시 잇자는 마음에서 『태백산맥』이란 제목을 정했다고 고백했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런저런 사실이 궁금해지면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에 가보기를 권한다. 2008년 11월에 개관한 그곳에는 200자 원고지 16,500매에 이르는 육필 원고를 비롯해 159건 719점의 증여 작품이 전시돼 있어, 집필과 탈고의 과정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지난 2014년부터는 원작을 그대로 따라 쓴 독자들의 필사본도 세계 최초로 전시하고 있다.

작가는 1권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이 “얼마나 역사의 소금을 뿌렸으며, 객관의 현미경으로 살폈는지 염려스러울 뿐”이라며 조심스러워했지만, 나는 『태백산맥』에서 역사의 소금이 전하는 짠맛을 제대로 맛봤다. 그리고 여수·순천 10·19사건(1948)에 대해서도 현미경을 들이대듯 촘촘히 살펴볼 수 있었다.

10권짜리 대하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 적막은 깊고, 무수한 별들의 반짝거리는 소리인 듯 바람소리가 멀리 스쳐 흐르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무덤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소설의 처음이 그믐달로 시작했다면 마지막은 별들의 반짝거림으로 끝났으니, 사람은 가고 달과 별만 남는 이치가 역사의 귀결이 아닌가 싶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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