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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실존·체험’의 언어
말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실존·체험’의 언어
  • 정지은
  • 승인 2023.05.12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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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말: 감각의 형태』 정지은 지음 | 은행나무 | 172쪽

말의 부차적 요소가 오히려 본질이 아닐까
인공지능이 만드는 언어 속 인간의 말 고찰

디지털 기술에 더해서 AI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들이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서 우리의 생활양식을 바꿔놓고 있다. 친구들이나 지인들 사이에서 통화보다는 문자 메시지가 더 일상적인 소통의 수단이 되고, 식당과 카페에서도  키오스크 주문이 늘어나고 있다. 한마디로 음성 언어보다 텍스트 언어가, 표현보다 필요한 메시지의 전달이 이루어지는 시대다. 

그런데 언어가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여전히 시와 소설을 읽고, 노래를 들으며, 써진 말들과 함께 그 속에 담긴 감정에 공감한다. 이 감정이 작품을 창작하면서 저자가 품었던 것과 같은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아무튼 언어는 메시지 이외의 것을 전달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더 근본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말을 통해 관계를 맺고, 사회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한다. 문자 언어와 달리 말은 목소리와 어조를 통해서 말하는 자가 의식하지 않은 감정과 태도까지 전달해준다. 말은 신체를 동원한다. 즉 말은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말하는 자를 드러내고 타인과 관계를 맺게 해준다. 실존주의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는 자신이 후설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충분히 밝히면서도 수학의 기호와 같은 순수 언어를 지향했던 후설의 언어 관념을 비판하고, 그가 간과했던 실존적 의미의 언어를 강조했다. 삶과 신체의 능동성이 표출되는 말은 당연히 노래할 때처럼 우리의 목소리를 끌어낼 것이다. 

말에 대한 나의 관심은 코로나 시기 동안 생겨났다. 비대면으로 강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 나는 강의 내용을 떠나서 나의 말이 어떤 식으로 학생들에게 전달되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비대면 환경 속에서 모든 주의가 말에 집중되기 때문에, 음성과 어조, 말의 속도 등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며, 내용을 잘 전달하려면 말의 그런 부차적인 요소들을 정확하게 의식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음성, 어조, 말의 속도 등이 실은 말에서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과 함께 나는 말이 갖는 폭넓은 함의를 고찰하게 됐다.

루소는 확실한 문법 체계를 세우려는 당대의 경향에 맞서 언어의 기원을 상상하면서 말의 정념성과 자연성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루소처럼 자연과 문화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기보다는 인간 신체의 실존 안에서 그 둘의 공존을 보았던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는 자신의 방식으로 인간의 말 안에서 본래적이면서 가장 원초적인 지향성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두 철학자, 루소와 메를로 퐁티의 언어 이론에 대한 독서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이자 시작점이 됐다.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프랑스의 철학자로서 장폴 사르트르와 함께 프랑스 현대 철학의 양대 산맥이다. 사진=위키백과

이 책은 우선 말에 대한 책이다. 말의 발생과 정의, 말의 실존적 의미, 말속에 녹아 있는 감각과 체험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이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첫 번째 장에서는 루소, 자크 라캉과 프로이트, 그리고 소쉬르의 언어이론이 간략하게 소개됐다. 루소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언어의 시작에 대한 가설을 세웠다면, 프로이트와 라캉은 한 개인의 역사 안에서 어떻게 언어가 도착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소쉬르는 최초로 언어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학자이다. 

두 번째 장은 말의 실존적 측면을 다뤘다. 메를로 퐁티의 신체 현상학 안에서 말을 조명했고, 들뢰즈의 무인도 이론을 통해서 타인의 존재 여부가 한 개인의 지각과 말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았다. 세 번째 장은 체험과 감각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문학 작품들과 문장 속에 들어와 있는지를 논했고, 이를 위해서 메를로 퐁티의 키아즘, 들뢰즈의 프루스트론,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의 은유이론을 참고했다. 

AI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언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AI가 간단한 기사는 물론 소설과 시를 써내는 시대다. AI와 함께 앞으로 전개될 미래가 어떨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할 테지만, 적어도 인간의 말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면 AI와 함께 살아갈 인류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조금은 덜 수 있지 않을까.

 

 

 

정지은
홍익대 교양과 교수·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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