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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관계사를 넘어선 제3세계 사회주의 건설사 
식민지 관계사를 넘어선 제3세계 사회주의 건설사 
  • 우동현
  • 승인 2023.05.26 1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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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시대, 우리에게 ‘냉전’은 무엇이었나⑦ 제3세계 재평가

제3세계의 사회주의 ‘혁명’은 어려움과 곤란, 교훈의 연속이었다. 
인도네시아·칠레·탄자니아·앙골라·이란은 
공산주의 강대국(소련·중국)에 경도되지 않고 
독자적인 사회주의를 만들려고 했다. 

‘제3세계’라는 말이 처음 나온 1952년 이후에도 각국의 경제력과 발전 정도를 가지고 국가를 분류하는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냉전기 제1세계는 여전히 선진국이고, 지난 연재에서 다뤘듯이 제2세계의 현재는 여전히 복잡하다. 제3세계는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으로 명명된다.

60년대 중반 국내에 등장한 제3세계

냉전기 대한민국-제3세계 관계사는 무척 흥미롭다. 국내 언론은 1960년대 중반부터 제3세계(제3세력, 제3지대)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제3세계는 자유진영(서구)과 공산진영(동구)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 세력을 가리켰다. 당시 신문에서 네루(인도)·나세르(이집트)·은크루마(가나)·수카르노(인도네시아)와 같은 지도자의 사진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제3세계’는 후진·약소·저개발(저발전) 등의 개념과 연동됐고,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를 포괄적으로 의미했다. 남미에서 개발된 개념인 종속이론도 ‘제3세계’와 결부돼 지면에 실렸다. <경향신문>이 1985년 10~11월 사이 게재한 연재에서는 아시아(인도·파키스탄·인도네시아), 아프리카(이집트·케냐·나이지리아), 라틴아메리카(아르헨티나·콜롬비아·칠레·페루)에 나간 특파원들이 일종의 글로벌 반면교사를 서울로 송신했다.

냉전기 한국은 선진국도 아니었고, 제3세계도 아니었다. 제1세계(미국·일본·서유럽)의 자본·시장·기술을 열망했던 한국에게 제3세계는 북한과 경합하는 무대였다. 한편 한국은 1979년도 OECD 연례보고서에 처음 등장한 개념인 신흥공업국가(NIC)의 대표로 인정받는다. 1996년,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일본(1964)에 이어 두 번째이자 유이한 OECD 회원국으로 거듭난다.

1979년 한국의 TV 조립 라인의 모습이다. 사진=OECD Observer (1979년 1월)

제2·제3세계와 야심 찬 외교 펼친 북한

반면 북한은 국제적으로 정당성을 얻기 위해 제2·제3세계를 대상으로 야심 찬 외교를 펼쳤다. 1960년대 중후반, 평양은 독자적으로 제1세계(영국·일본·네덜란드) 및 제2세계로부터 자본·기술을 들여오려고 노력하는 한편, 반제(反帝)와 주체의 슬로건을 내걸고 제3세계와의 동일시에 나선다. 호응이 적지 않았다.

미국의 무장흑인단체 흑표당(Black Panther Party) 대표가 평양을 방문(1969~1970)했고, 유럽 사회학자들은 북한식 경제발전의 비밀을 『Socialist Korea』라는 제목으로 출간(1976)했다. 1980년대 북한은 ‘록색혁명’의 기적을 약속하며 ‘주체농법’을 아프리카에 수출했다.

냉전 강대국의 제3세계 탐구는 비교적 일찍 시작됐다. 1950년대부터 미국 사회과학계가 한반도와 인도차이나반도의 ‘적’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산물인 냉전 문화나 미국 사회과학의 군사화는 현재 활발히 탐구되는 역사학적 주제이다.

‘문서고 혁명’ 이후 미국의 베트남학계·중동학계·남미학계·아프리카학계의 성장과 유관 학자들의 활약은 사뭇 놀랍다. 2000년에는 강대국 중심의 제3세계사 연구를 극복하고 냉전사의 전개에서 제3세계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주변중심적(pericentric) 접근이 제기되기도 했다. 아쉽게도, 한국이나 북한은 이러한 제3세계 연구 흐름의 바깥에 놓여있다.

『Ripe for Revolution』(2021)의 표지

독특한 공산주의 이념의 역사 간직한 제3세계

냉전 강대국과의 관계사 위주로 진행되는 제3세계 연구 중 최근 나온 가장 독창적인 성과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역사학 교수 제레미 프리드먼의 『Ripe for Revolution』(2022)일 것이다. 이 연구는 지구적 남반부(Global South)에서 공산주의 이념의 역사를 인도네시아·칠레·탄자니아·앙골라·이란의 사례를 가지고 살핀다.

다섯 나라는 공산주의 강대국(소련·중국)에 경도되지 않고 독자적인 사회주의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제3세계의 사회주의 ‘혁명’은 어려움과 곤란, 교훈의 연속이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야권 공산당이던 인도네시아공산당(PKI)은 사회주의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로 독재자 수카르노를 지지했다. 하지만 1965년 쿠데타에 이은 대규모 학살로 PKI는 괴멸했다. 이 사건을 통해 소련은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에서 다당제 의회주의와 종교(이슬람)의 역할에 대해 재고한다.

1970년 칠레의 마르크스주의 정치인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소련은 선거와 연정을 통한 평화적인 사회주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중국은 동의하지 않았다. 아옌데의 인민연합(UP)은 평화적 이행 개념을 두고 내홍을 겪다가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의해 전복됐다. 소련은 “혁명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라는 교훈을 얻었다. 

오늘날 제3세계를 규정하는 사회주의적 기원

한편 계급 갈등보다 인종 갈등이, 공업보다 농업이 주가 된 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실패(탄자니아) 또는 절충(앙골라)이었다. 포르투갈제국을 몰아낸 앙골라 집권당은 사회주의 건설에 드는 재원 확보가 절실했다. 그들은 쿠바 병사들과 함께 제1세계 회사들이 지배하는 유전(油田)을 지키기 위해 미국·중국의 사주를 받은 대항 세력과 싸우는 광경을 연출했다.

이란에서는 이란민중당이 소련과 동독의 조언을 수용, 사회주의 혁명에서 이슬람을 이용하고자 했다. 이란 공산주의자들은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아옌데 같은 인물로 보고 그를 적극 지원했다. 그 결과는 민중 혁명을 통한 왕정의 전복과 신정(神政)의 수립이었다.

프리드먼의 메시지는 간결하다. 제3세계 사회주의 건설사를 단순히 제1·제3세계 관계사, 또는 냉전기 식민모국-식민지 관계사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러시아와 중국을 포함해 14개국 문서고에서 수집한 데이터로 재구성한 냉전기 제3세계 연구사의 획을 긋는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동현 카이스트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조교수
UCLA에서 과학기술사(북한-소련 관계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The Historical Journal』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을 발표했다. 역서로는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 『플루토피아』, 『저주받은 원자』, 국제공산주의운동을 2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풀어낸 『전쟁의 유령』(가제)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총서 36권 및 38-39권을 공역했다. 주요 관심사는 냉전사·핵역사·환경기술사·디지털역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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