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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재 둘러싼 갈등…‘경제인류학’에서 실마리를 찾다
공유재 둘러싼 갈등…‘경제인류학’에서 실마리를 찾다
  • 정헌목
  • 승인 2023.05.26 1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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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호혜와 협동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정헌목 외 5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408쪽

조선시대 선물교환부터 현대 협동조합까지 분석
정상성 넘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구축의 과제

2000년대 후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 이후, 주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대안 모색이 여러 방면에서 전개되었다. 특히 국내·외 학계에서 중요한 대안 이론으로 부상한 것이 바로 마르셀 모스(1872∼1950)와 칼 폴라니(1886∼1964) 등을 중심으로 한 인류학의 학문적 유산이다. 모스의 『증여론』(1925)이나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1944)에 담긴 인류학적 논의는 경제를 인간의 삶을 경유하여 사회 내 다른 영역과의 복합적인 상호 관계 속에서 파악할 것을 주문한다. 인간의 행위 동기를 합리적 선택과 개인의 이기심에서 찾으려는 시장 중심 논리를 넘어, 바야흐로 ‘경제’에 관한 인류학적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대인 것이다.

호혜성·공동체·공유재 등은 이 같은 대안적 논의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개념이다. 이 책은 이들을 아우르는 ‘호혜와 협동’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하여 그와 관련한 이론과 개념의 심층적 분석을 제시한 학술서이다. 전체 12장에 걸친 책의 내용은 호혜성과 선물(증여)교환, 나눔, 공동체 등 기본 개념에 대한 분석과 함께, 조선시대 양반 사족층의 선물 관행에서부터 최근의 협동조합에 이르는 구체적 사례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담고 있다. 필자를 포함해 6명으로 구성된 공저자들은 3년에 걸친 공동연구를 수행하며 매달 함께 모여 아이디어를 나누고 서로의 논의를 점검하는 자리를 가졌다. 어찌 보면 이 책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연구진의 ‘호혜와 협동’을 실천하는 과정이기도 했던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자들이 문자 그대로의 호혜와 협동을 긍정적인 가치로만 보고 전통적인 공동체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호혜성·공동체·공유재 등을 낭만화하는 시각을 지양하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의 대안 모색을 위해 각 개념을 현실적인 차원에서 재조정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를 위해 각각의 현상을 둘러싼 개념에 관한 이론적 분석을 중심으로 이들이 과거와 현대의 다양한 사례에서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진단했다.

이를테면 책의 첫 장은 호혜성 개념의 학사적(學史的) 계보를 추적하여 국내에서 주로 ‘호혜성’이라 번역되는 ‘reciprocity’ 개념 자체가 어떤 도덕적 당위성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사회의 조직 원리라는 점을 밝혀낸다. 따라서 호혜성의 좋은 점만을 강조하여 차가운 현대사회의 대안이자 잃어버린 전통사회의 이상향으로 호혜적 관계가 대두될 때, 집단 내 약자의 위치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호혜적 관계의 복원이 위계적인 보호나 착취 관계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장에서는 공동체와 관련한 기존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공동의 이해관계나 공통의 가치 및 정체성과 같은 일반적인 기준만으로 공동체를 판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성장 위주의 자본주의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소수자와 난민 등 타자에 대한 혐오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정상성에 매몰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시급한 과제임을 강조했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조선시대에서 현대사회에 이르는 한국의 사례들을 한국적 특수성으로만 재단하는 대신 보편학문으로서 인류학의 이론과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폭넓게 분석한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각종 공유재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등 현대 한국 사회의 사례 연구는 물론, 조선시대의 선물교환에 대해 경제인류학 이론을 적용한 분석까지 다양하고 참신한 이론적 접근을 진행했다. 이 같은 접근은 한국의 사례를 활용하여 인류학 분야에서의 이론적 정교화를 모색하는 시도인 한편, 동시에 ‘지역학으로서의 한국학’을 넘어 특수성에 매이지 않은 한국학을 추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인류학의 논의를 이론적 자원으로 삼아 한국학의 외연 확장에 기여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이 책에 담겨 있는 것이다.

‘호혜와 협동’이라는 측면에서 과거 한국의 사례를 다룬 역사학계의 연구나, 사회과학 일반에서 진행되어 온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 관련 연구가 드물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류학의 이론 및 개념에 초점을 맞춰 과거와 현재의 사례를 아우르며 집중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쉽게 찾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이 지금까지와는 차별화된 관점을 제시하며 새로운 논의의 장을 열 수 있길 기대한다.

 

 

정헌목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류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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