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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  
인생이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  
  • 김병희
  • 승인 2023.05.25 0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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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22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

작가의 손을 떠난 예술작품은 누가 어떻게 향유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김수영(1921~1968) 시인의 「풀」은 많이들 알고 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어떤 문학인은 「풀」을 권력에 저항하는 시로 읽었지만, 실연당한 사람은 똑같은 시를 사랑의 아픔으로 읽을 수도 있다.

시인은 기득권과 권력자를 비꼬는 시를 많이 썼다. 그러면서도 모든 사물이 시가 될 수 있고 모든 사물에서 시어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과감하고 전위적인 시를 써서 알려주었다.

민음사의 『김수영 전집』 광고(동아일보, 1976. 9. 28.)

민음사의 ‘김수영 책 특집’ 광고에서는 “김수영 문학의 결정판”이란 헤드라인을 써서 이미 나온 책 2권과 새로 나올 책 2권을 소개했다(동아일보, 1976. 9. 28.). 선을 그었을 뿐인데 부리부리한 눈매를 강조한 시인의 인상에 한 눈에 파악되는 펜화가 인상적이다.

하지만 책을 소개하는 카피에 비문(非文)과 무미건조한 표현이 많아 실망스럽다. 언어의 경제성과 세련미를 추구한 시인의 시집과 산문집을 소개하는 카피가 겨우 이 수준이라니, 책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 같다.   

시집 『거대한 뿌리』(1974)를 설명하는 카피를 확인해보자. “김수영의 시적 주제는 자유이다. (…) 그것의 실현을 불가능케 하는 여건들에 대해 노래한다. 그의 시가 노래한다라고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절규한다.” 책값 500원의 시집을 알리는 카피는 영어의 번역 문장처럼 대명사(‘그것’)가 너무 많다.

책값 880원의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1975)를 설명하는 카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시대 이상의 숲을 피투성이가 되며 헤쳐간 시인 김수영. 시만으로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풀기 위하여 써낸 주옥같은 수필, 고해 같은 일기, 포효 같은 시론 등, 그의 산문의 정수를 우리는 이 책에서 한 눈에 볼 수 있다.” 서술이 매끄럽지 않고 억지로 쓴 느낌이며 번역투의 문장이 많다.  

책값 980원의 산문집 『퓨리턴의 초상』(1976)을 설명하는 카피는 이렇다. “누가 김수영이를 잊어버릴 것인가, (…) 자기 자신을 온몸으로 폭로하는 서한집 등 불타는 김수영 열정의 메시지가 이 책을 채우고 있다.” 시인을 ‘김수영이’라며 하대하는 듯 표현한 점도 조금 거슬린다.

민음사 『시여, 침을 뱉어라』 초판(1975)

시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6)는 책값이 750원이었는데, 제목 앞에는 시집이라 명명하고 보디카피에서는 사화집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시대를 가장 적나라하게 충돌하고 고민하다가 사거(死去)한 진정의 대변자 김수영이 그의 충격의 시선 ‘거대한 뿌리’ 이후에 미발표 유작에서 정선한 사화집(詞華集)이다.”

사화집이란 한 명이나 여러 명의 시나 문장을 어떤 기준에 따라 골라 모아 엮은 책인데, 보디카피에서는 시 선집인데도 선집의 특성을 매력적으로 강조하지 못했다. 

광고 카피의 수준은 낮았지만 김수영의 시와 시론집은 잘 팔렸다. 이는 광고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시인의 이름값과 무게감 덕분이었다. 그의 시와 시론집은 독자에게 죽비처럼 강하게 다가갔지만, 특히 『시여, 침을 뱉어라』는 한국 문학계에 강렬한 메시지를 남겼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에 대한 그의 생각이 오롯이 압축된 이 문장은 한국 시사(詩史)에 남을 중요한 경구로 자리 잡았고, 후배 시인들은 금과옥조로 삼았다고 한다. 결국 그의 시론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온몸의 시학’이라 명명할 수 있다.

깊은 사유가 스며있는 시와 산문에서 시인은 현실의 부조리한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시인이 주로 활동했던 1960년대는 경제개발 시기로 한국 사회가 역동적으로 돌아갔지만, 그만큼 혼돈과 탐욕이 판을 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 시절에 김수영은 시집 제목처럼 자신이 자신에게 박는 ‘거대한 뿌리’ 같은 존재가 되기를 소망했다.

그는 혼돈의 역사에 휘둘리지 않고 일상에서 시적 소재를 발견하는 탁월한 감수성으로 시를 썼다. 그는 현실의 부조리한 문제를 짚어내는 사회적 발언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혼돈과 탐욕스런 현실에 눈 감지 말고 치열한 대결 의식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민음사에서 오늘의 산문선집을 기획하며 『시여, 침을 뱉어라』를 제1권으로 선정한 데서도 책의 무게와 가치를 가늠할 수 있다. 1975년 6월 15일에 초판이 나왔는데 시인이 세상을 떠난 다음이었다. 225쪽의 갈피마다 시인의 깊은 사유가 스며있다.

나는 훗날 광고 카피를 쓰며 힘들 때마다 종종 이 책을 펼치며 시란 단어를 광고로 바꿔 읽었다. “광고 창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다른 모든 삶도 똑같지 않겠나.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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