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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울에서 박사하기’를 넘어선 실천을 기대한다
‘미국·서울에서 박사하기’를 넘어선 실천을 기대한다
  • 홍덕구
  • 승인 2023.05.2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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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박사하기』와 서평을 읽고_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한국에서 박사하기』는 양면으로 포위되어 있다. 『서울 리뷰 오브 북스』에 실린 김두얼 명지대 교수의 서평은 이들에게 ‘일국가적 사례(특수)가 아닌 이론(보편)으로서의 학문(이라 쓰고, K-학문이라고 읽는다)’을 요구한다.

김종영 경희대 교수는 <교수신문> 기고에서 이들에게 대학과 학계를 기만하고 착취해 온 기성 정치, 제도와의 연대를 기대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두 편의 글은 관점도 지향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이 책에서 ‘학술 엘리트(의 미달태)’를 읽어내고, 이들에게 보다 거시적이고 대국적인 지향과 실천을 기대하고 있다.

두 논평자 모두 ‘미국에서 박사하기’를 경험했다는 점이 내게는 문제적으로 보였다. 그들에게 『한국에서 박사하기』는 너무나도 소박하고 ‘로컬한 기획일지도 모르겠다.

김종영의 조언과는 달리, ‘한국에서 박사하기’의 문제의식과 비판정신은 오히려 기성 제도와 정치를 상대하며 예리하게 벼려진 것이다. 필자들은 대학원생의 인권·노동권·학습권을 쟁취하기 위해 연대하고, 대학·학술기구·정치인들을 테이블로 불러내어 개선의 약속을 받아내고, 이를 통해 대학원생과 연구자들을 규합하는 지난한 작업을 지속해온 이들이다.

나는 대학원생노조 조합원으로 활동하며 이들의 활동을 지근거리에서 목격했다. 이들의 동기는 김두얼이 비판한 1980~1990년대식 학술운동에 대한 지향과 무관하다. 과거 학술운동의 주체들이 역사와 변혁의 주인으로 스스로를 의미화했다면, 이들은 ‘학술운동이 곧 사회변혁’이라는 거대한 기치가 상실된 이후, 가속화된 학술장과 각자도생의 논리가 만들어낸 폐허의 주민이다. 혹자는 폐허 따위는 버리고 떠나라고 하겠지만, 폐허에서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자들도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입장에서의 비판도 있다. “명문대 대학원은 은마 아파트”(『한국에서 박사하기』 185쪽)라는 비유로 표상되는 서울-수도권 중심성에 대한 비판이다. 필자들이 지방대학을 의도적으로 타자화하지는 않았다고 믿는다. 다만 저 비유가 모든 독자에게 고르게 가 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한마디 쓴소리를 더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은마 아파트가 서울 공화국의 상징이라서가 아니다. 이 책이 서울-수도권과 지방을 부러 구분하지 않고, 한국의 대학원과 학계 일반을 이야기하는 이상, 이러한 표현은 매우 부적절하다.

사실 진짜 문제는 비유나 수사가 아니다. 고려대·서울대·성균관대·카이스트 등 이른바 ‘명문대생’으로 이루어진 필진들에게 ‘한국에서 박사하기’는 곧 ‘서울-수도권에서 박사하기’였을 테니까(카이스트가 대전에 있다는 점은 넘어가자). 김종영이 이들을 “학계의 주류가 아니라 경계인”으로 지칭한 것이 내게는 대단히 생경했는데, 이들은 학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학벌 피라미드의 상부에 위치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지방대학(원)의 문제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다. 학력주의와 서울 중심주의가 존재하는 한, 지방에서 연구와 교육을 이어나가는 연구자들에게 이 책은 ‘지배받는 지배자’들의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해결책으로 제시된 ‘학문 공동체’, ‘연구자 네트워크’, ‘학술지식의 대중화’는 서울-수도권에서보다 지방에서 훨씬 더 실현되기 어렵다. 생색내기용으로 지방대 소속 필진을 한두 명 배치하는 정도로 가려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책의 시도는 도리어 정직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한국에서 박사하기』는 지방(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

물론 이 책에는 장점이 훨씬 더 많다. ‘심슨 짤’로 대표되는 대학원 문제의 희화화 경향을 비판하고 논의가 ‘불행 배틀’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다 보니, 대학 간의 차이와 위계에 집중하지 못한 점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대학원과 학계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이토록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연구를 지속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에도 크게 공감했다.

나의 관심은 결국 이 책이 열어젖힌 가능성과 이후의 실천으로 수렴된다. 연구의 의미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학력주의와 서울 수도권-중심성을 해체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에서 박사하기’ 팀의 다음 행보를 응원하고 연대하겠다.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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