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13:45 (토)
명예로운 행위란 무엇인가, 연보를 읽는 새로운 눈
명예로운 행위란 무엇인가, 연보를 읽는 새로운 눈
  • 최혜미
  • 승인 2023.06.07 08: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40 연보 연구, 편찬자를 주목하는 이유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연보의 구성 원리는 기억할 만한 행적을 선별하는 것이다. 
선별의 기준이 가장 중요하다. 
연보의 메시지는 무엇을 명예로운 행적으로 인정할 것인가로 결정된다. 
이 기준에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편찬자의 관심사다. 
연보 주인공의 생애는 역사적 사실이라기 보다는 
편찬자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서사에 가깝다. 
연보를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이다.

필자의 연구 분야인 한문학은 한문으로 기록된 일체의 문헌을 다룬다. 주된 연구 대상은 전근대시대 개인의 문집이다. 한국의 분과 체계상 한문학은 국어국문학의 하위분과에 속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한문학의 연구 범위가 반드시 문학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한문학 연구자가 생각하는 한문학

흔히 한문학은 현대적 학문분과 개념이 무색하게 문사철(文史哲)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인문학 분야로 간주되는데, 사실 해당 연구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딱히 아우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연구 대상으로 삼는 인물이 대개 본업 정치가에 문장가·사상가·역사가 등을 겸하고 있고 한 사람의 문집에 각각의 역할에 적합한 온갖 양식의 글이 수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 편의 글에도 문사철이 다 포함되어 있는 바에야 별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언뜻 고리타분해 보이는 분과명과는 달리 한문학 분야는 학문적으로 연구의 주제나 방법론 선택에 있어서 자못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다.

다만 자료에 대한 엄밀성은 강도 높게 요구되는 편이다. 대부분의 한문학 연구자는 문헌의 확인과 한문 원문의 교감·입력·번역 등 실제 논문 서술에는 몇 줄 혹은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는 기초작업에 태반의 시간을 할애한다. 이 역시 부득이한 것인데 아무리 매끄러운 논의를 엮어낸다 한들 ‘그거 번역 틀렸는데요.’라는 한 마디의 지적이 전체 논의의 구도를 무너뜨리는 것을 막을 방법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모든 한문학 연구자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으나, 필자는 자료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 적지 않은 수련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한문학은 일종의 자유전공에 가깝다고 느껴왔다. ‘연보(年譜)’를 주제로 삼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은 ‘국어국문학’의 이름표를 달고 제출되기는 했지만 ‘문학성’에 관한 논의는 거의 담겨 있지 않다. 이는 한문으로 된 것이면 모두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고, 자료에의 접근이 신중하면 어떤 방법도 포용하는 한문학 분과의 토양에서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연보 연구의 함정, 진실성에 대한 집착

필자가 논문의 제재로 삼은 ‘연보’는 그간 연구 대상으로서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한 자료이다. 연보는 특정 인물의 언행이나 관련 사실을 연도를 기준으로 정리해 놓은 저술로 보통 문집의 부록에 딸려 있다.

연구자들에게 연보는 일종의 사료(史料)처럼 간주되어 인물의 생애 정보를 확인하는 참고 자료로 주로 활용되고, 학문적 분석의 대상으로 접근할 만한 가치는 크지 않다고 여겨졌다. 이와 함께 연보에는 태생적으로 후손이 선조를 칭양하려는 목적으로 작성하는 경우가 많아 종종 윤색 혹은 왜곡된 기록이 포함되는 문제도 존재한다.

이와 같은 통념은, 연보가 실제로 그런 문헌이기에 필자 역시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연보에 대한 필자의 최초 접근 역시 연보와 『승정원일기』 등의 관찬 사료, 동시대인의 문집 등을 대조하여 연보에 실린 생애 정보의 진위를 판별하고, 사실의 공백을 메꾸려는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같은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다 보니 석연찮은 의문점이 생겨났다.

생애 정보의 진위를 판별하는 작업은 하나의 분명한 역사적 진실이 존재한다는 ―그것을 밝히려는 노력이 흔히 좌절될지라도―전제에서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자료를 볼수록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거나 적어도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자는 남겨진 글을 통해서만 과거를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반드시 누군가의 고심 끝에 선별되어 남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겨진 글이 보장해주는 것은 기록된 내용의 진실성보다는 그것을 후세에 전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의 의지에 관한 것이 아닐까. 여기에 생각이 닿고서 필자의 연구는 연보를 편찬한 사람들을 추적하는 방향으로 변경되었다.

연보는 특정 인물의 언행이나 관련 사실을 연도를 기준으로 정리해 놓은 저술이다. 보통 문집의 부록에 딸려 있다. 인물의 생애 정보를 확인하는 참고 자료로 주로 활용된다. 조선시대 연보 편찬의 관습은 「퇴계연보」에서 정립됐다. 사진=경희대 도서관 제공

연보 편간의 맥락 속에서 발견한 사실

한국의 연보는 고려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생산되었는데, 인물에 대한 갖가지 정보를 연보에 자세히 수록하는 관습이 정착된 것은 대략 16세기 후반~17세기 중엽의 일이다. 그 이전 시기의 연보는 대부분 보주(譜主 연보의 주인공)의 관직 이력을 나열한 한두 장짜리 약력에 가까웠다. 그러다 16세기 후반부터 강목(綱目)이라는 형식이 도입되면서 연보의 편폭이 급증하는 양상이 포착되는 것이다. 

현전하는 주요 연보 문헌을 생산된 시기를 기준으로 일별하자, 드문드문 존재하는 연보들 사이로 심상치 않은 이름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과 같은 각 당파의 종장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장편 연보가 강목식 연보의 역사 첫머리부터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목식 연보는 애초에 전국적으로 정치적·학문적 명성이 현저한 인물들만을 대상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보주의 거대한 권위만큼 편찬자의 존재감 역시 만만찮았다. 이황의 연보는 유성룡(柳成龍)이, 이이의 연보는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이, 성혼의 연보는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이 담당하여 학파를 대표하는 직·재전 제자들이 편찬의 총책임을 맡았다. 이 시기 연보 편찬의 사례를 살펴보면 학파의 핵심적인 상징성을 지닌 인물의 연보가 주요 제자들을 중심으로 집단적인 협업을 통해 작성되는 경우가 두드러진다.

이들이 편찬한 연보의 내용을 살펴보면 단순히 선사(先師)의 훌륭한 업적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특별하게 강조하는 범주의 행적이 있다. 특히 성리학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이를 도덕적으로 실천하는 사례와 학문으로 임금을 계도하는 면모 등은 예외 없이 자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문집에 동일한 내용이 있다면 출전을 밝히는 정도로 처리해도 되었을 텐데 중복의 번거로움을 불사하고 연보에 다시 수록하는 경우도 확인된다. 단순히 사실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물론 상기의 행적은 조선 전기에도 미덕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양상이 특수하고 중요한 까닭은 개인의 모범적 행적들이 도통(道統)의 맥락에서 의미부여되고 있다는 점이다. 각 연보는 보주를 국가적인 유현(儒賢)의 면모에 적합한 인물로 그려내고 있고, 이는 보주가 도통의 정당한 계승자로서 적합한 자격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서 기능하였다.

편찬자들이 명시했든 명시하지 않았든 이러한 작업은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염두에 둔 것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집단에게 실질적인 정치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된다.
 
편찬자에 착목하는 연보 연구의 시사점

조선 후기 인물에게 당색(黨色)은 그의 핵심적인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그 당파적 정체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왔을까. 이 쉽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에 접근하는 데 연보의 연구가 유의미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연보의 구성 원리는 기억할 만한 행적을 선별하는 것이므로 선별의 기준이 가장 중요하다. 연보의 메시지는 무엇을 명예로운 행적으로 인정할 것인가, 어떠한 의도로 사실들을 선별하고 해석하며 배치할 것인가에서 결정된다.

이 기준에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 편찬자들의 관심사이다. 그렇기에 편찬자들이 재구성한 보주의 생애는 보주에 대한 사실이라기 보다는, 편찬자들이 규정하는 혹은 인정받고 싶어 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관한 서사에 가깝다. 이것이 연보에 대한 접근을 내용에서 편찬자로, 내용의 사실 여부에서 명예로운 행위의 선별 기준으로 옮겨왔을 때 얻을 수 있는 유용한 시사점이다.

필자는 기왕에 수행한 연구에서 17세까지의 연보사를 다루었다. 그러나 문집과 마찬가지로 연보의 양적 폭발 역시 18세기부터 현저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며, 연보의 생산 밀도는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높아졌다. 18세기에 들어 연보는 더욱 복잡하고 많은 사정을 담아내게 되는데, 그 정점에 송시열(宋時烈)의 연보인 『우암연보(尤庵年譜)』가 자리한다.

더불어 18세기 연보에 두드러지는 당론서(黨論書)로서의 성격이나 노론계·소론계 인물의 연보에서 드러나는 충군(忠君)에 대한 상이한 입장, 19~20세기의 지방 유림의 연보 간행 양상과 실기류(實記類) 저술의 유행 등 연보와 관련하여 앞으로 해명해야 할 주제들이 산적해 있다.

향후 필자는 남은 숙제를 차근차근 해결하며 조선시대 연보사를 개괄해 나갈 계획이다. 이를 통해서 그간 한국학 연구사의 변두리에 있었던 연보가 활발한 논의의 장으로 포섭되는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

최혜미 강릉원주대 강사
2022년 고려대 국문과에서 「17세기 연보 편간의 역사적 맥락」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고전번역원의 『승정원일기』 국역 사업에 번역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개인의 연대기를 대상으로 문헌의 생산 과정과 사회문화적 배경을 참조하여 역사적 의미를 탐구하는 작업을 해왔다. 주요 발표 논문으로는 「『忠烈錄』 소재 『贈遼東伯詔』의 위작 여부에 대한 고찰」, 「官人 自撰年譜의 편찬 배경과 서술 의식」, 「『退溪年譜』 편찬의 역사적 배경과 그 의미」 등이 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