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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사회 자정운동 없으면 자유 뺏길 것”…‘삶으로서의 역사’
“교수사회 자정운동 없으면 자유 뺏길 것”…‘삶으로서의 역사’
  • 김재호
  • 승인 2023.06.03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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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기_『삶으로서의 역사: 나의 서양사 편력기』 이영석 지음 | 아카넷 | 376쪽

한 평생 영국근대사를 연구해온 이영석 전 광주대 교수(1953∼2022). 그는 스스로 하나의 역사가 됐다. 자신이 지나온 학문의 여정을 마치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삶으로서의 역사: 나의 서양사 편력기』에 기록한 것이다. 특히 뒤늦게 시작한, SNS에 담겼던 여러 글이 역사의 옷을 입고 책에 담겼다. 

역사는 삶이고, 삶이 곧 역사이다. 역사가의 삶 또한 역사가 된다. 이 교수의 지적 편력은 서양사이지만, 역사학 전반에 걸쳐 있다. 이 책에는 1970∼1980년대 대학사회에서 공부하고, 1990∼2020년대까지 교수로 학문을 탐구한 지적 여행기가 담겨 있다. 이 교수는 연구서 10권, 공저·편저 14권, 번역서 5권, 연구논문 108편, 서평·소론 21편을 집필했다. 아울러, 그는 국내외 학술대회·세미나에서 77회 발표했다. 

이 교수가 공부할 때 중요했던 건 독서모임과 의식화운동이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는 데 보수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인식하는 지적 기반이 된 것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로 구성됐다. 이 교수는 “이 시기 진보적 독서 모임의 경향, 추세, 의미 등을 실증적으로 탐색하려는 연구는 내가 알기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며 “언젠가 좀 더 심층적이고 체계적인 탐구를 통해 진보적 독서의 사회사적, 운동사적 의미를 재구성할 있기를 소망한다”라고 강조했다. 

한 역사 연구자의 삶은 지적 여정과 함께 하나의 역사가 됐다. 고 이영석 광주대 교수의 생전 모습.

 

한 역사가의 SNS 촌철살인

영국의 노동사, 사회사, 생활사 등을 탐구한 결론 끝에 이 교수는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은 부적합하다고 결론지었다. 우리가 흔히 간주하듯이, 산업혁명으로 인해 근대성이 급작스럽게 열린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저 ‘조용한 혁명’이었다. 이 교수는 “산업혁명은 기계와 공장제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라며 “경제 전반에 걸쳐서 전통적 부문과 근대적 부문이 공존하는 불균등 발전의 모습을 나타낼 뿐이었다”라고 적었다. 단, 산업혁명은 새로운 인간관계의 산업자본주의를 드러내는 언어적 사건이었다. 그러한 인간관계란 노동자와 자본가일 것이다. 

이 교수는 케네스 포메란츠 미국 시카고대 교수(역사학과)의 『대분기』(에코리브르 | 686쪽)를 언급했다. “18세기 말까지 잉글랜드와 중국 양쯔강 델타지역의 경제는 사실상 차이가 없었다는 주장은 산업혁명기 기계를 다시 생각할 필요성을 던져 주었다.” 비슷한 시기의 비슷한 경제 상황은 어떻게 영국이 앞서 나가는 ‘대분기’를 맞게 됐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 신대륙 자원의 이용이다. 둘째, 영국 북부에 있는 노천탄광 덕분이다. 풍부한 석탄 이용이 가능했던 영국은 조용한 혁명(산업혁명)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18세기 말 잉글랜드·양쯔강 델타지역 모두 인구증가와 노동강화로 생태적 위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근대화라는 성지에 먼저 도착해, 식민주의라는 야욕을 펼쳤다. 이 교수는 “잉글랜드가 중국과 다른 역사적 경로를 밟은 것은 신대륙의 해외자원과 값싼 화석에너지(석탄)를 이용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에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세기 이후, 대분기로 나아갔다. 서유럽이 자본집약적인 사회경제를 만들어가고 있을 때, 동아시아는 노동집약적인 사회경제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대분기’ 이후, 최근 중국의 행보는 무서울 정도다. 이 교수는 “중국의 거대한 변화는 역사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적었다. 이 때문에 서유럽의 근대화론은 유럽의 저력이 아니라 우연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가 주목을 받고 있다. 

 

에도시대 지식인들의 ‘역대(歷代)의 사(史)’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사(歷史)’라는 용어의 기원이다. 역사는 메이지 6년인 1874년, 영어 ‘history’의 번역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1606년, 이미 중국 명대에는 ‘歷史’라는 표현이 『역사강감보』라는 제목에 등장하기도 했다. 

일본 에도시대에는 역사라는 표현이 가끔 사용됐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지금 역사의 의미와는 다르게, 역사라는 말이 ‘역대(歷代)의 사(史)’를 뜻했다. “즉 『사기』나 『한서』 같은 중국 역사서의 총체를 뜻하는 말로 사용된 것이다.” 에도시대 지식인들은 중국 역대의 정사를 통해 권위를 위한 설득의 논리를 찾았다. 이 교수는 “요시다 요코쿠의 『수진영화절용집』(1871) 이후 ‘히스토리’의 역어로 ‘역사’가 정착된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삶으로서의 역사: 나의 서양사 편력기』에서 눈길을 끌었던 건 교수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이 교수는 동료들과 대학 근처의 한 식당에 갔다가 음식점 아주머니의 얘기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 그 식당에 교수들이 자주 와서 화투를 쳤기 때문이다. 교수에게 부여된 자유는 당연히 책임을 수반한다. 이 교수는 “교수가 자신의 자유를 드러내고 과시할수록 분노가 증폭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나는 교수사회에서 강조해야 할 첫 번째 덕목이 바로 겸손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교수사회에 자정운동이 전개되지 않고 현재의 추세가 이어진다면, 언젠가 사회는 교수들에게 부여한 그 자유를 회수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한편, 교수한테 교육·연구의 자유를 부여한 근대대학의 이념은 19세기 군국주의국가 프로이센으로부터였다고 한다. 

 

나쁜 역사가로 전락하는 것 경계해야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인식했던 이 교수. 우리가 알고 있는 아널드 토인비(1889~1975)와 에드워드 카(1892~1982)도 영국 사학계에서는 비주류였다고 한다. 심지어 대학에서 자리를 잡지도 못했다. 그는 열악한 환경인 지방의 한 사립대에서 역사학과가 아니라 외국어학부에서 홀로 역사연구에서 분투했다. 

이 교수는 역사학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내용을 저술하면서, 역사연구에서 객관성을 담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렸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이 교수는 “역사 지식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사회적 기억’”이라며 “훌륭한 역사가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나쁜 역사가로 전락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해야 하는 것”이라고 당부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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