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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비평_(4) 아이러니의 귀재, 진중권
문체비평_(4) 아이러니의 귀재, 진중권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09.23 0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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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세속성’ 완성되다 … 풍경 없는 미학

글 잘 쓰는 사람의 문체만 살펴보는 관행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 진중권은 글을 잘 쓰기로 소문났지만 문체라 할만한 것은 별로 없다. 아무리 문체 분석이 글쓴이의 심성과 콤플렉스 같은 걸 엿보는 일이지만, 문체를 통해 엿본 심성이 다시 그의 글과 짝짝꿍이 돼야 분석의 보람이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진중권은 네이밍이 힘든 문필가이다.

진중권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너무 수사학적인 것들이라 시끄럽고 혼돈만 준다.

가령 경쾌하고 발랄하다는 내용들이다. 그런 것이 문체일 수는 없다. 문체는 무늬이고 문신이기 때문이다. 경쾌함은 글이 뿜어내는 콧김이라서 거기 묻어난 냄새만으로는 글에 내재하는 고유성의 무늬를 짐작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우회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우선 그가 글을 쓰고 있는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중권이 文名을 떨칠 때 그의 명함은 자유기고가였다. 자유롭게 기고한다는 두 개념은 아웃사이더와 비주류를 동시에 상징한다. 아웃사이더에 할애되는 지면은 주로 비판과 저격의 성격을 띤다. 진중권의 글쓰기는 누군가의 허점을 잡아내는 걸 목적으로 했고 대부분 승리의 웃음을 웃고 있다. 어떨 땐 시작부터 웃어젖히기도 하고, 가끔은 뒷부분에 가서 아주 잔인하게 씩 웃기도 했다.

사실 그는 한국사회에서 비평의 세속성을 완성시킨 인물이다. 천박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글이 비판대상을 향해 다이렉트로 뻗어갈 수 있게 권위나 숭고함 같은 것들, 비평의 과도한 윤리성 같은 것을 쳐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글의 소재, 풀어나가는 방식, 끌어들이는 예화, 감정의 드러냄과 감춤 같은 것들이 오직 비판대상을 거꾸러뜨리기 위해 최적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성이란 것은 비평의 실용성이란 의미도 된다. 하지만 굳이 세속성이라 하는 이유는 그의 글은 상대방을 향한 야유와 무시, 마치 원숭이를 보는 듯한 시선이 기본 바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러한 스타일은 초기에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와의 자존심까지 내건 논쟁, 시인 박남철과의 길고 긴 꼬투리잡기 등 게시판형식의 리플달기를 통해 필연적으로 얻어진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대개의 진지한 글이 화자가 배후에 깊숙이 물러나 있는 반면, 진중권의 글은 화자가 글 안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이꼴 저꼴을 다 보이는 일종의 희극배우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분장도 다양하게 했다. 어떨 때는 재판관이 되었다가, 전사가 되기도 하고 사제가 되는가 하면 지극히 사적 개인으로서의 주장을 펼친다.

이런 점에서 그의 글은 일종의 ‘發話의 장르’다. 어떤 입장이 되어 발화하느냐에 따라 동일사안이 전혀 다르게 묘사되곤 했다. 그러나 그의 화자들에게서 받는 최종적인 느낌은 자상한 가정주부의 모습에 가깝다. 이것저것 챙겨주고 부지런한 모습이 그것이다. 바로 이런 차별화가 기존의 고루한 남성어른의 비평을 혁신하는 효과를 낸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진중권의 글쓰기는 그 목적은 쉽게 이뤄내곤 했지만, 그의 말마따나 “나중엔 몸이 비난의 칼집으로 가득해야 희열을 느끼는 변태”와도 같이 그의 비평적 자아는 지나친 자외선에 노출되어 갔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평의 세속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의 글이 대상을 잡아먹는 식인성 담론이라도, 곁방살이 글쓰기라는 본질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비평이 창작에 절절매듯, 비판은 외다리 타법이기에 시원하게 찌를 순 있어도 혼자서 걸어다니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진중권의 글은 매우 사교적이다. 늘 놀아줄 친구가 있어야 하기에, 紅燈을 켜놓고 사람을 유인한다. 그의 글에서 온갖 진귀한 인류학적 테마나, 알렉산더 같은 예기치 못한 인물의 격언,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로테스크 회화를 변형시켜 현실을 크로키하는 장면 등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진중권의 글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이 죽는지도 모른다고 그랬던가.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이 좋다는 속담을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서인지, 그의 처형방식은 진지하게 찬반논쟁으로 첨예화되기보다 지식사회의 뒷담화를 구축하는 하나의 촉매가 되어 이야깃거리로 풍성해지고 소비되는 측면이 강했다.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진중권은 말놀이의 귀재다. 저잣거리의 평론가답게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을  ‘폭력과 상스러움’이라고 비트는 데 ‘점 하나를 바꾸는’ 트로트의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응수하는 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는 받침 하나를 빼내어 말의 권위 전체가 폭삭 무너지게 하는 지극히 ‘양아치적인’ 방식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말놀이의 뒤에 도사린 그의 “총체적인 개성의 총체적인 관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아이러니를 발견하는, 사안등을 아이러니로 구조화하는 눈일지도 모르겠다. “(한국 언론은) 좋지 않은 일에는 ‘원인’을 찾기보다는 ‘범인’을 찾고, 좋은 일에는 ‘원인’ 대신 ‘은인’을 찾는다”는 발언이 한 예다. 누가 어떤 말을 하면 “너의 그 말이 너라는 존재를 아이러니로 만든다”라고 공격하는 게 진중권의 방식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진중권의 언어생활도 이데올로기에 깊숙이 침윤된 측면이 있는 셈이다.

바흐친에 따르면 근대 언어의 본질인 아이러니는 담화의 육중하고 과장된 미문성과 장황함을 파괴했다. 그것은 통사론의 규칙을 교란하고 그 범위도 굉장히 넓어 감지할 수 없는 최소한의 것에서부터 크게는 웃음의 경계에 맞닿아 있는 야단스러운 것에 이르기까지 사방에 편재해 있다. 바흐친은 아이러니를 근대의 모든 언어가 갖는 기본적인 속성으로 보고 있는데, 진중권의 언어야말로 “아이러니에 의해 침투당한 근대의 조건화된 언어”다.

하지만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존재의 뒤편으로 아주 멀리 돌아가는 아이러니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루카치적인 진지함이 여기엔 없다. ‘조건화된’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그것은 선천적인 본성이 점점 무르익어 생활화된 것이고 일상에서 타인을 대하는 방식으로 자리잡는 것에 가깝다. 이것 또한 아이러니의 세속화라고 하면 무리일까.

글이라는 것이 때때로 매우 조형적이고 회화적으로 감상될 수 있다는 고전적 명제에 비춰본다면, 진중권의 글은 무언가 결여돼 있는 것처럼 어딘가 허전하다. 그곳엔 몸을 담글만한 풍경이란 것이 없다.

왜일까. 그 이유의 일부를 바로 아이러니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비판대상에게도 공격적이지만, 글을 읽는 독자에게도 어느 정도 폭력적이다. 평심을 흐뜨려 인식을 교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교훈적이고 훌륭하지만, 이런 체험이 반복되면 글은 편안하지 않은 공간, 되새길 수 없고 추억의 여지가 삭제된 처치곤란의 물건이 돼버린다. 이것은 논쟁의 한계인가 아니면 진중권의 한계인가.

물론 진중권에게 독자적인 영역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독일에서 미학을 전공한 학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수들의 글에 미학성이 결여돼 있다고 비판해온 그는 미학 관련 대중서적을 여러 권 펴내면서 서구미술사를 독특한 관점으로 서술하기도 했다. 주로 화폭에서 ‘죽음’이나 ‘춤’ 같은 테마를 읽어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난감한 것은 미학에세이의 진중권 또한 정치평론의 진중권과 별 다를 점이 없다는 것이다. 가볍게 툭툭 건드리거나, 피셔 같은 아이템을 적절히 배치하거나, 대화체를 빌어서 소설처럼 글을 쓴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의 유명작 ‘미학오디세이’ 연작에서 한 가지 흐름으로 잡히는 것은 ‘경계의 미학’이다.

여기서 진중권은 예술의 임계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예술의 임계점은 그것이 예술로서의 자율성, 예술과 삶 사이에서 그 본래성을 잃어버리려는 찰라이다. 따라서 위기에 휩싸여 있다. 그 위기를 말하고 싶은 게 진중권의 내밀한 욕망이다.

그런데 그건 참 희한한 얘기이기도 하다. 근본적으로 볼 때 경계는 철학자가 꼼꼼하게 따져야 할 문제이고, 예술가의 주름을 늘게 하는 존재론적 고민의 차원에 속한다. 물론 경계를 진지하게 따진다고 진중권이 미학자가 아닌 것은 아니겠지만, 그의 에세이에서 바슐라르나 월터 페이터 같은 미학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지난 8월 한 인터뷰에서 그는 ‘미디어 미학’에 전념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인터넷을 철학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게 왜 미학일까 의문이다.

이는 진중권의 책 가운데 가장 고백적인 문체로 씌어진 ‘앙겔루스 노부스’를 읽어봐도 그의 예술론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되는 데는 실패했다. 그가 철학과 미학을 여전히 혼동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지독한 텍스트주의를 문체론이라고 생각하는 전공변호인들처럼 그 또한 전공의 함정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끝으로 취향과 정서 차원에서 한가지. 어린 시절 친구들의 ‘에레베스트’를 ‘에베레스트’로 교정해주던 그는 ‘왕따’와 ‘집단의 일원’ 사이를 반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혼자의 추억이 많고 글 속에서도 개인의 정서가 강하다.

당연히 집단의 정서는 약하다. 집단문화에 대해 쏟아내는 그의 ‘환멸’은 민족주의에 대한 박노자의 비판에 못지않다. 하지만 모든 글이 그렇듯 공동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개인은, 아니 이해는 해도 애정이 없다면 글은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지난 1년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하루 4시간 쪽잠을 자는 강행군을 마친 그는 최근 ‘休筆’을 선언했다. 재충전 후에는 ‘논객’이 아니라 ‘사실 전달자’나 ‘이야기꾼’이 돼서 돌아오고 싶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하지만 그 전에 ‘환멸의 상처’와 같은 제목의 글을 한두편 쓰지 않을까 싶다.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니 말이다. 벌써 그 조짐은 나타나고 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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