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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학자 추정보다 3배 크고 건물 배치도 달라
일본학자 추정보다 3배 크고 건물 배치도 달라
  • 조유전 / 토지박물관장
  • 승인 2007.06.1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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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발굴 뒷이야기]일제 현황조사 뒤집은 ‘황룡사 터’

신라 천년고도인 경주시를 방문하여 시내에서 위락단지인 보문단지를 찾아 나서면 시 외곽의 동편에 유명한 신라시대의 모전석탑(模塼石塔)이 있는 분황사(芬皇寺)를 지나가게 된다.
이 분황사 남쪽으로 펼쳐지는 넓은 뜰이 바로 신라 황룡사(皇龍寺)가 있었던 터다. 지금도 주변으로 학술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황룡사는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비교적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민가 철거뒤 황룡사탑 사리 도굴사건
그런데 이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최초로 현황을 조사한 사람이 일본 건축학자 후지시마가이지로(藤鳥亥次郞)인데 그는 일제강점기인1930년대 동경대학교 건축학부를 졸업하고 식민지로 경영하고 있던 우리나라 땅에 들어와 여러 곳의 고대건물터를 조사했다.
그 가운데 황룡사터를 두 번 답사한 후 황룡사가람 즉 황룡사가 있을 당시 탑, 법당 등 사찰의 여러 건물배치를 작성하여 건축학회지에 소개했다.
광복 후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고 이 황룡사터도 사적으로 지정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마을을 이루고 논,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파괴가 계속되고 있었다.
다만 부처님을 모셨던 법당인 금당터와 9층목탑터가 외형상으로 나타나 있어 그 위용을 어렴풋이나마 추측하고 있었지만 목탑의 가장 중심에 놓이는 기둥의 받침 초석이 놓여있는 심초석(心礎石)위에 민가의 담장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건의해서 그 민가를 보상하고 철거하여 그런대로 정비를 해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민가의 담장을 헐어낸 것이 도굴꾼의 표적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64년 12월 어느 날 칠흑같이 어두운 한밤중을 틈타 1천 3백여 년 심초석에 고이 간직되어 오던 황룡사탑의 사리(舍利)가 도굴자의 손에 감쪽같이 도둑맞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범인은 잡히지 않아 결국 오리무중 미해결 도굴사건으로 넘어가는 듯 범인을 잡을 도리가 없었다. 혹시나 국외로 반출되지 않을까 관심가진 사람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불국사 석가탑 사리구 도굴 미수사건
그런데 2년후인 1966년9월 5일 불국사에 있는 3층석탑 즉 석가탑(釋迦塔)의 사리구(舍利具) 도굴 미수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를 진단한 전문학자는 도굴범에 의해 3층탑이 훼손된 것이 눈으로 보아도 명백하며 도둑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주장한 반면 현지 경찰은 자연붕괴현상이라고 우기다 자연붕괴이지 도둑의 소행인지 조사해 봐야 알겠다고 한발 물러서기도 했다.
결국 경주경찰서에서 범인 일당을 체포함으로써 도굴의 소행임이 밝혀졌던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이들의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 황룡사 목탑의 사리구를 훔쳤다는 자백을 받아내어 생각하지도 않았던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고 아울러 사리장엄구 일체도 회수하게 되어 서울의 국립박물관에 보관되게 되었다.
그런데 잡힌 도굴범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가 골동상으로 특히 두목인 김 아무개는 전과 2범의 전문 도굴범이었고 부두목은 윤 아무개는 아이러니하게도 경주박물관에서 10여 년간 수위로 근무한 경력의 소유자였음이 밝혀져 세상을 더욱 놀라게 했다.
광복 후 이러한 좋지 못한 역사를 간직한 황룡사터를 1970년에 들어와 잘 정비해서 호국사찰의 도량으로 삼고자 경주관광개발 10개년 계획에 포함되어 발굴조사가 불가피하게 되었다.발굴조사는 우선 100여 호로 이루어진 구황동(九皇洞) 민가 마을 전체를 이주시킴으로써 동 이름조차 없어지기도 했지만 당초 계획은 3개년 계획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에 현황조사 내용을 토대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어 1976년부터 발굴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첫해부터 계획의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건물의 배치상태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건물배치였음을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단서가 발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8개년 계획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룡사는 일본학자가 추정했던 건물배치보다도 3배에 달하는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아울러 전혀 다른 건물의 배치상태를 보여주었다. 우리 손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다른 목적으로 개발되었다면
영원히 일제가 왜곡한 것을 그대로 믿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발굴조사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일깨운 발굴이라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높이 80미터의 ‘세계적 목조탑’추정
발굴결과 불국사에서 보이는 다보탑과 석가탑 그리고 대웅전(大雄殿), 무설전(無說殿)을 에워싼 회랑(回廊)내 면적의 8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고 법당인 금당(金堂)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건물인 경복궁 경회루의 기단면적보다도 훨씬 큰 건물은 물론 높이 80여 미터에 이르는 대 목조탑이 있었던 것임을 상상만 해도 가히 당시 세계의 으뜸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발굴과정에 잊을 수 없는 일은 박정희 대통령의 현장 방문이었다.
발굴조사가 4년째 접어든 1979년 1월 4일, 신년 연휴를 3일간 보내고 그날은 시무식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시무식준비를 하고 있던 조사대원들은 영문도 모르고 최고통치자를 맞이했다.
발굴현장을 둘러보고 난 후 “조사가 완료되면 신라시대의 특색 있는 담장을 고증하여 쌓고 담장 안의 사찰유구는 그대로 두되 9층목탑은 복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 데 콘크리트로 세우는 문제를 검토해 보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당시나 지금이나 대통령의 지시에 반한다면그 직을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콘크리트로 9층탑을 세운다면 한마디로 국적 없는 괴건물이 벌판 한 가운데 서 있게 되어 보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복원의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콘크리트로서는 안 될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다음해의 예산은 마련하는데 까지 진전되었다. 다행이랄까 천행이랄까 그해 10. 26 사건으로 타계함으로써 자연 없던 일도 되었던 것이다.

조유전 / 토지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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