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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간 중국 송·원시대 도자기 등 유물 2만여점 발굴
9년간 중국 송·원시대 도자기 등 유물 2만여점 발굴
  • 교수신문
  • 승인 2007.07.0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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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발굴 뒷이야기]어부 그물에 건져 올린 ‘신안 보물섬’

광주에는 국립광주박물관이 있고 목포에는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이 있다. 왜 이들 박물관과 전시관이 만들어졌는지 그 연원을 알고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중 몇 명이나 될까, 박물관 관계자 몇 사람을 재외하고는 모를 것이다. 한마디로 신안보물선 인양의 결과로 탄생된 문화시설이다.
신안군 지도면 도덕도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수많은 송·원(宋·元)대의 중국도자유물 들은 바로 고려시대 중국의 보물을 실은 화물선이 이곳에서 난파되어 바다 속에 묻혀있다 발견되어 우리 손으로 건져 올려졌고 난파되었던 배에 수많은 문화재가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고대 보물선을 건져 올린 결과를 가져왔다.
1975년 겨울 어느 날 서울 종로구 창선동에 자리하고 있던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문화재과로 신안에 산다는 어느 한 어부가 중국도자기 몇 점을 보자기에 아무렇게나 싸들고 왔다. 말하자면 신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도자기 가운데 1점은 목이 긴 화병형태였는데 긴 목에 코일을 감은 듯한 모습으로 만들어진 중국 원나라 시대의 대형 청자였다. 이 물건을 본 직원들은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신안군에 사는 어부가 고기잡이를 나갔다 그물에 걸려 건져진 것을 주위사람들의 말을 듣고 문화재관리국에 신고하기 위해 가져왔던 것이다.
이 청자가 문화재관리국에 신고 된 이듬해 봄부터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즉 신안 앞바다에 묻혀있는 중국 청자들을 잠수부들이 건져 불법거래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문화재관리국에서도 문화재사범 처리 팀이 소문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검찰과 합동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된 문화재관리국은 긴급 조사단을 구성하는 한편 청자가 인양된 일대의 바다를 서둘러 보호구역으로 정했다.
이렇게 되어 1976년 10월 드디어 신안해저유물발굴작업에 들어갔다. 그때까지 수중발굴 전문기관이나 단체가 전무한 시절이었고 장비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문화재관리국이 발굴조사를 주관하면서 장비와 인력은 해군의 힘을 빌리고 조사는 육지에서 하는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이때 동원된 해군함정은 덕수함이었고 동원된 해군은 소위 수중폭파대인 UDT가 아닌 해전에서 침몰된 선체를 물속에서 수리하는 일을 맡은 해난구조대원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평균 수심은 평균 20m로 조수에 따라 차이가 4m정도 되었다. 그러나 그 보다도 유속이 평균 2.5노트로 빠른 편인데다 삼각파도까지 일어 물속은 항상 뿌옇게 흐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수중촬영을 불가능하게 했다. 물의 흐름이 없는 시간은 하루에 고작 15분 정도에 불과한데 이때는 밀물과 썰물이 바뀌는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물 인양작업은 이 시간을 이용해야 했다.
첫해는 탐색작업이었지만 악조건에서도 손으로 더듬어 난파선이 개펄에 묻혀있음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국보급에 해당되는 송원대 유물 1백여 점을 인양했다. 이 유물인양작업은 청와대의 높은 관심을 샀다.
이듬해인 1977년 초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전남 광주에 국립박물관건립을 특별 지시함으로써 그해 6월 17일 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서울의 국립박물관에서는 그때까지 인양한 중국도자기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시개관이 되기 전인 8월 23일, 박정희대통령이 국립박물관을 방문하여 전시준비 중인 신안해저에서 인양유물을 관람하기도 했다. 그리고 최규하 국무총리를 비롯 모든 국무위원들도 관람했다. 당시 인양된 유물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국립광주박물관은 기공식 후 1년 반 만인 1978년 12월 6일 박대통령을 초청해 준공식을 가졌고 이때의 개관전시는 이 신안출토유물을 주 전시품으로 하였던 것이다.
수중 발굴작업이 해를 거듭하여 계속되는 동안 선체의 규모도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었고 유물도 갈수록 많은 양이 인양되었다.
그런데 유물보다 매몰되어있는 선체(船體)를 어떻게 인양해야 하느냐가 커다란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문제는 그때까지 수백 년 동안 개펄에 묻혀있던 나무배를 어떻게 올리며 어떤 방법으로 보존하느냐에 있었다. 선체의 길이가 약 30m에 이르고 무게 또한 2백톤 이상으로 추산되어 현장여건과 아울러 원형을 유지한 상태로 인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해체해서 인양하고 보존처리 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1981년 7차의 유물인양조사를 끝내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목포에 보존처리장을 마련했던 것이다. 즉 해체되어 인양되는 보물선의 선체와 아울러 목재류의 보존과 복원에 따른 연구를 현지에서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마련된 목포보존처리장이 목포해양유물처리소로 만들어지고 드디어 1994년 문화재관리국 소속 목포해양유물전시관으로 독립되었다. 선체를 분해해 건져 올린 지 20여 년간의 보존 처리와 복원작업을 마치고 2004년부터 복원된 자태로 전시되어 전시관을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 신안해저유물발굴은 1984년에 이르러 9년간 10차의 인양조사를 마치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서 많은 얘기를 남겼다.
도자기류를 포함한 2만여 점의 유물을 비롯 해 약 28톤 8백만개의 중국동전 등 출토된 유물뿐 아니라 해군함정 수중폭파전문인 UDT 보다도 잠수실력이 뛰어나다는 해군해난구조대원을 장기간 유물인양발굴에 동원된 일은 세계사에서도 없는 일이 되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배는 중국의 산동성 영파에서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하던 화물선이었는데 항해 도중 신안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되었음이 밝혀졌고 아울러 화주가 일본 구주에 있는 동복사(東福寺)였음도 밝혀진 것이다.
선체는 중국이지만 화물의 주인은 일본인데 우리나라 앞바다에서 침몰되어 자칫 국제분쟁의 소지도 있었지만 아무튼 이 신안보물선의 발굴작업은 결과적으로 국립광주박물관과 국립목포해양유물전시관이 건립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조유전 / 토지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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