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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야성 이룬 단동-적막한 신의주...‘전쟁 상처’ 대조적
불야성 이룬 단동-적막한 신의주...‘전쟁 상처’ 대조적
  • 교수신문
  • 승인 2007.07.02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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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中國 散策]국경의 두 도시

중국 단동 시와 북한 신의주 시 사이로 압록강이 흐른다. 두 도시는 국경도시이다. 흐르는 강물의 가운데가 국경이다. 밤의 두 도시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단동이 밤마다 不夜城을 이룬다고 한다면 신의주의 밤은 적막 그대로다. 단동의 강변엔 고층 아파트가 줄지어 서 있고, 지금도 공사 중인 아파트 군이 곳곳에 솟아있다. 하늘 높이 치솟는 분수의 물줄기를 비쳐주는 조명의 불빛도 휘황찬란하다. 광장 한 모서리엔 아마추어 악사들이 트럼펫과 기타 연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유럽이나 미국의 밤 산책과 별다르지 않은 풍경들이다.
강 건너편의 깊이 잠든 어둠의 세계를 응시하면서 하늘로 치솟는 단동의 분수를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누구 약 올리는 거야?”라는 말이 입속을 맴돈다. 한 때는 정반대인 시절도 있었다. 중국이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으로 경제침체의 깊은 늪에 빠져 있을 때, 북한은 전후의 복구에 성공하고 있었다. 60년대 후반까지도 한국은 북한을 추월하느라 안간힘하는 형편이었다.
북한에 친인척을 둔 중국 조선족 동포들은 그때와 오늘, 명암이 엇갈려있는 현실에 곤혹스러워 한다. 중국이 어려울 때, 그들은 북한 친인척의 도움을 받았고, 지금은 거꾸로 북한의 친인척을 도와주기에 바쁘다. 한번 북한을 다녀오면 며칠씩 밥맛을 잃는다는 동포도 있다. 두만강 하류의 훈춘이나 압록강 하류의 단동은 이러한 국경도시들의 독특한 분위기를 잘 드러낸다.
지난 5월 28일, 단동을 찾았다. 연길에서 심양으로 비행기로 날아갔고, 비행장에서 곧바로 柳河라는 곳으로 향했다. 미국서 온 옛 친구가 유하와 단동을 찾을 일이 있어서 동행으로 따라나선 길이었다. 가는 길에 점심을 먹은 시간을 포함해서 거의 네 시간이나 걸려 유하에 도착했다. 길은 잘 포장되어 있었지만 가는 길이 그만큼 멀었다. 유하에서 단동으로 가는 길도 어지간히 멀었다. 심양으로 되돌아가서 거기서 瀋丹고속도로를 타고 단동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심양과 단동을 잇는 이 고속도로도 세 시간 남짓 걸리는 짧지 않은 거리였다. 정확하게 밤 12시에 예약된 호텔에서 짐을 풀 수 있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한국의 어린이들은 ‘6.25’를 잘 모른다.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던 전쟁, 혹은 임진왜란과 혼동하는 어린이들도 적지 않았다. 더구나 현재의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6.25’는 스치는 이야기 정도로 두 세군 데에 나올 뿐이다. 그들에게 이 노래는 너무나 생소하고 이해하기 힘든 노래일 것이다. 지금의 60대 이상 세대들은 해마다 6월이 오면 이 <6.25의 노래>를 열심히 불렀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새, 정확하게 지난 10년 세월에, 대한민국에서 “조국”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고, “원수”는 지구상에서 가장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북한은 자신을 일컬어 반드시 “조국”이라는 호칭을 쓴다. 북한 사람들과 대화할 때 “조국”이라는 말을 쓰면 훨씬 다정해진다. 한반도의 남쪽에서 사라진 ”조국”이 북쪽 땅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노래는 차라리 북한 어린이들이 불러야 할 노래라 할 것이다. 아직도 북한은 1950년대의 한국전쟁을  “북침”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한국에서 사실상 잊어버린 노래가 돼 버렸다. “민족공조”라는 큰 물살 때문이다. 어느 해이던가, 국방부가 제작한 포스터에 한국의 국군과 북한의 인민군이 형제처럼 나란히 다정하게 그려져 있어서 말썽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원수’와 ‘적군’이 어느 한 순간 그림 한 장으로 ‘친구’와 ‘형제’가 되어버렸던 이 해프닝도 “민족공조”의 큰 그림에서 나온 것이었다.
단동과 신의주를 잇는 쌍둥이 다리가 있다. 하나는 철로와 육로가 있어서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가장 분주한 다리가 되어 있지만, 다른 하나는 강 위의 국경선에서 북한 쪽으로 가는 교각이 파괴된 채 복구되지 않고 있다. “압록강 斷橋”이다. 단동에서 신의주로 가다가 정확하게 반쪽이 날아 가 버린 이 다리는,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을 막기 위해 미군 폭격기 1백 여대가 1950년 11월 8일부터 1주일간 융단폭격을 가한 결과물이다.
끊어진 다리의 난간에 서 보니 6.25 한국전쟁은 이미 흘러가버린 전쟁이 아니었다. 현재 진행형의 아주 큰 덩치의 역사 덩어리로 나를 압박해 오는 것이었다. 새삼스레 북한을 ‘원수’로 보고 싶어서 이 노래를 인용한 것은 물론 아니다. 나 자신 이미 두 차례나 평양을 다녀왔었고, 연변이나 상해의 북한 식당에서 ‘조국’의 젊은 여 ‘복무원’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눌 줄도 안다. ‘조국’의 소중한 노래 “사향가”도 혼자 흥얼거릴 정도로 북한에 대한 이해와 애정도 갖고 있다.
그러나 엄연히 살아있는 전쟁의 실체 앞에서 가치의 歪曲 내지 顚倒현상이 너무 심각하지 않은가 하는 강한 의문을 떨어버릴 수 없었다. 망각과 극복은 다르다. 6.25 한국전쟁은 극복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망각해도 될 그 무엇은 아닌 것이다. 중국 어디를 가나 정치교육, 사회교육이 잘 되어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이 단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단동에서 출발하는 지점에서 단교의 끝 부분까지, 중공군의 참전에 관한 설명문이 차례로 진열되어 있었다.
다리 진입로에 팽덕회 사령관을 중심으로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한 중국인민군의 커다란 부조상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중공군은 이 압록강을 건너서 한반도로 진군했던 것이다. 단교 난간에서 관광객인 듯싶은 7~8명의 중국 노파들이 자기네끼리 무슨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강 건너 북한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는 말들을 들어보니, “우리 중국이 대단해. 우리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오늘 저 북한이 있을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 속삭임의 골자였다.
아마도 나이로 보아 참전 군인들의 가족들인 것 같았다. 그중엔 전사자도 있을 수 있고, 그 후 영웅이 되어 출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옷매무새도 모두들 정갈하여 요즘 중국 경제의 현주소를 잘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어떤 형태로든 ‘전쟁세대’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냉전사고’와 ‘분단의식’을 떨어버리지 못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들은 우리로서는 분통해야 할 한국전 참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들의 국가관, 혹은 애국심과 밀착시키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우월감은 요즘 중국인들의 넘치는 자신감과 절묘한 배합을 이루고 있었다. 나날이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네와 대조적이었다. 요즘에 와서 중국이 우리를 조금씩 깔보기 시작한 것은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한국은 6.25 전쟁을 마음속에서 점점 지워가고 있는 반면에, 중국은 사회교육, 정치교육을 통해 ‘승리한 전쟁’으로 인민들을 단련하고 있다. 단동의 끊어진 다리는 나에게 6.25 전쟁을 다시 역사의 실체로 환기시켜 주었다.  
며칠 뒤 상해로 가서 양산 심수항을 찾았다. 32.5 킬로미터의 세계 최장이라는 ‘동해대교’를 건넜다. 거기 펼쳐진 장대한 시설물은 전쟁의 상처를 이미 넘어 서버린, 전후 세대의 치열한 국가 건설을 위한 집념과, 젊은 중국인의 새로운 끼를 한껏 발산하고  있었다.

□ 중국 관동과 북한 신의주를 잇는 다리 모습. 오른쪽이 압록강 ‘단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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