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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감시’ 전진기지, 보존 못해 아파트 단지로
‘풍납토성 감시’ 전진기지, 보존 못해 아파트 단지로
  • 교수신문
  • 승인 2007.07.09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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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발굴 뒷이야기]‘백제시대 무덤’으로 잘못 알려졌던 ‘구의동 고구려보루유적’

□ 구의동유적 ‘양이부장동호’

현재의 서울 광진구 구의동 일대는 현대아파트 등이 들어서 한강이 조망되는 살기 좋은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일대가 과거 백제와 고구려의 유적으로 뒤덮혀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1970년대 불어 닥친 개발열풍은 이곳이라고 가만 두지 않았다. 택지개발이 이루어지기전  지금의 워커힐 뒷산인 아차산(阿且山)에서 뻗어 내린 능선이 이곳 아파트단지가 있는 곳에서 한강에 접해 해발 53미터의 야트막한 구릉을 이루면서 끝나고 있었다. 바로 지금의 현대아파트가 자리한 곳이 그 구릉이 있었던 곳이다. 서울시가 마련한 화양동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면서 이 구릉 약 3천여 평이 토취장으로 평탄화가 이루어져야 했다. 말하자면 구릉을 헐어 낮은 곳을 매워 평지를 조성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토취장이 된 구릉 정상에 폐 무덤 하나가 있어 주변 마을 사람들은 말 무덤이니 장군총이니 심지어 조선왕실에서 왕족의 태를 묻은 태실이라고 전해오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외형상으로 보아 틀림없는 고분이라고 진단하고, 발굴조사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1977년 7월 단지 조성을 맡은 서울시에서는 서울대 박물관에 발굴조사를 의뢰했다. 발굴을 맡은 김원룡 박물관장은 조사의 시급성을 감안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문화재연구실(현 국립문화재연구소) 직원 일부의 지원과 단국대학교 박물관, 숭전대학교(현 숭실대) 박물관 직원의 지원을 얻어 마침 여름방학 중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학부생을 동원 발굴조사에 나섰다.
당시 현장주변은 개발계획에 따라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발굴현장 부근에 쓰레기소각장이 있어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실제로 곡괭이와 삽을 들고 작업할 인부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 아니었다. 원래 발굴조사인부의 노임은 국가가 정해놓은 단가를 적용해야하기 때문에 그 기준으로는 시중 공사판 노임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 주변의 공사장 인부를 동원하기는 아예 처음부터 생각을 접어야 했다.
그런데 조사요원 가운데 한 사람이 주변 마을에 백수생활하면서 주먹께나 쓰는 한 친구와 친분이 있었다. 말하자면 오늘날 마을 조폭이라 할까. 이 사람에게 인부 구하기 어려운 처지를 부탁해 일거에 해결하게 되었다. 법보다 주먹의 힘에 눌려 지냈던 시절이었기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서 어려운 인부를 구해 조사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발굴조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발굴과정에 흥분과 함께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처음 생각에 단순히 고분으로 판단했고 무덤의 가장자리를 따라 석축이 마련된 것을 확인했을 때는 이것이 무덤을 보호하는 보호석축으로 알았다. 그리고 다행히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무덤임이 분명하고 규모로 보아 혹시 어느 백제왕의 무덤이 아닐까 하는 기대에 조사원들은 흥분했던 것이다.
봉토를 재거하고 무덤 내부로 발굴해 들어가면서 생각하지 않았던 의외의 구조가 드러나 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왕릉이 아니었기 때문에 흥분이 실망으로 변했다. 심지어 무덤이라고 생각한 내부에서 온돌시설까지 마련되었음을 확인하고 난 후부터 이것이 과연 무덤이 틀림없는지 해석을 하기에는 고민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출토유물 가운데는 철제무기류, 농기구, 방추차를 비롯 다양한 토기들이 있어 이들만 보면 무덤인 것 같았다. 그러나 유물가운데 철제 화살촉을 비롯 철제무기류가 1천3백 여점에 달했다. 지금까지 삼국시대 무덤에서 철제무기류가 그렇게 대량으로 출토된 예가 없었다. 그래서 조사원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무덤이 아니라 특수시설, 즉 어떤 군사시설이 아닐까 의심도 했다.  
드디어 발굴조사가 끝날 무렵 그간의 조사 성과를 공개하는 현장설명회를 가졌다. 발굴단장을 맡은 김원룡교수는 “이 유적은 빈전일 가능성이 크다. 중심에 관을 넣고 목조 가옥을 세우고 출입시설까지 만든 임시 영혼의 생가로 보아야 하며 중국 수나라 역사책에도 고구려와 백제가 3년상(喪)을 했다는 기록이 뒷받침하고 있다. 더구나 1971년 발굴한 공주의 백제무령왕릉에서 왕과 왕비가 죽고 3년상을 치렀음이 확인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구의동 유적은 가묘(假廟)기능을 하다 3년 뒤에 가설건물을 전부 불사르고 그 위에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든 백제시대 무덤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발굴단장의 명쾌한 설명에 현장에 모였던 원로학자들도 대부분 수긍했고 모두 그 결론에 동의했다.
발굴조사가 완료된 후 이 유적은 토치장이 되어 지형이 아파트단지로 변해 그 흔적을 지웠다. 발굴 후 11년이 지난 1988년 겨울 다음해 있을 서울대 박물관유물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구의동출토 백제토기를 복원정리하던 연구사들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백제토기와는 다른 나팔입항아리(廣口長頸四耳壺)를 비롯해 고구려토기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고 발굴단장 이었던 김원룡교수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어 이 구의동유적이 백제고분에서 고구려유적으로 제자리를 찾는 계기가 마련됐다. 결국 유구 내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철제품과 온돌시설이 무덤 아닌 군사시설과 연관됨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즉 이 유적이 고구려남하 정책의 전진기지인 군사보루유적(軍事堡壘遺蹟)임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바로 강 건너 백제도성(百濟都城)으로 밝혀져 가고 있는 풍납토성(風納土城)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위치에 있어 당시 백제지역의 동태를 감시하는 전진기지였던 것이다. 이후 홍련봉보루 등 한강북쪽의 고구려 보루가 속속 밝혀지게 되었다. 보존되어야 할 중요유적이 이렇게 해서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졌고 지금에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조유전 / 토지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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