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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위기의 현장에 세계철학의 생수를
인문학 위기의 현장에 세계철학의 생수를
  • 교수신문
  • 승인 2007.07.2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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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철학대회 1년을 앞두고

인문학의 위기가 거론되는 한국에서 위기의식을 가장 크게 느끼는 분야는 아마도 철학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하지 않아도 좋고 없어져도 좋을 것이 철학이라면 이번 기회에 실용을 지향하는 학과로 전환을 하고 철학과를 아예 없애 버리는 것이 국가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철학이 그런 것인가?
역사적으로 볼 때 철학이 사회적인 각광을 받은 적은 별로 없지만, 철학의 생명력은 늘 사회의 생명력의 근원이었다. 철학이 죽으면 나라가 죽는다. 정신이 죽은 인간의 존재가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한국에서 인문학이 위기를 맞았는지는 몰라도 철학 자체가 위기를 맞을 수는 없다. 한국의 철학자들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철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돌아보면 한국 철학계는 다양한 발전을 이루어 왔다. 하나의 학회가 고답적이 될 때 다양한 성향의 학회들이 탄생하여 현재 7개의 전국규모의 학회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고, 대학의 강의가 강단철학으로 전락했을 때 재야의 철학활동이 생겨나 여러 형태로 사회적 활력을 부여했다. 이밖에도 수십 개의 분과학회들은 각기 다른 철학의 전문분야에 집중하며 깊이 있는 연구에 몰두해 오고 있다.
세계의 철학계도 지성계를 주도하는 힘 있는 사상을 쉼 없이 뿜어내고 있다. 그동안 학계를 주도한 서구의 철학이 여전히 그 생명력을 쏟아 내는 가운데, 아시아의 철학이 새로운 물줄기를 더하고 있고, 이 가운데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한국의 철학자들도 한둘이 아니다. 세계철학대회 서울대회는 이런 물줄기를 한반도로 옮겨 그 생수를 이 사회에 맛보게 하려는 시도이다.
세계철학대회는 1900년에 시작되어 현재는 5년마다 열리고 있고 내년에 열릴 서울대회는 22회에 해당한다. 5년 전에 이 대회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경합했던 그리스 아테네는 서양철학의 탄생지이다. 그 도시를 물리치고 서울이 대회를 유치하게 된 데에는 성숙해 있는 한국 철학계에 대한 인정이자, 세계가 새롭게 동양에 주목하고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지난 대회가 터키에서 열렸지만 그곳은 유럽에 인접해 있기에, 진정한 의미의 동양에서는 이번 대회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과 중국이 아닌 한국에서 처음 열리게 된 것도 한국철학계의 조직적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와 같은 조직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현재 조직위원회에서는 약 3천명의 철학자들이 이 대회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고, 소요 예산도 20억 가까이 된다. 저명한 철학자들이 발표를 담당할 주제강연과 심포지엄에서는 “오늘의 철학을 다시 생각한다”라는 대회 주제에 걸맞게 전통 철학의 분야들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며 관용의 문제, 세계화, 환경, 동양사상, 한국의 철학 등의 주제들이 철학의 거장들의 손에서 다루어지게 된다.
전 세계의 철학자들이 서로 어울려 사상적 담론의 장을 형성하게 될 분야는 모두 54개의 분과발표장이지만, 각 분과는 다시 세분되어 약 4백여개의 세션들이 총 7일간의 대회 기간에 분산 개최된다. 이미 접수를 시작한 이 분과발표에는 미국과 유럽의 학자들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동구,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지의 학자들이 이미 관심을 보이며 연락하기 시작했고, 중남미의 철학자들의 참여도 기대하고 있다.
조직위에서 생각하는 이번 대회의 일차적 목표는 한국의 철학자들이 세계의 여러 학자들을 직접 만나 교류를 갖는 것과, 한국 사회가 철학의 중요성을 재삼 인식하는 계기를 갖게 하는 것이다. 한국의 여러 철학적 활동과 업적들이 이 대회에 반영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고, 북한 철학계도 가능하면 초청할 수 있도록 한국철학회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다.
이번 대회가 극동지역에서 열리는 까닭에 서구인들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적겠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아시아의 철학자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도록 하여 이들 간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지난 6월 일본과 중국, 대만의 학자들이 모여 아시아 철학대회를 가지며 성공적인 내년의 대회를 기약하였다. 또한 철학이 미미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동남아 각지의 국가들에서 활동하는 철학자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취지에 따라 대회 장소를 처음 계획했던 강남 코엑스에서 서울대로 옮겼다. 서울대에서 개최함으로써 한국의 대학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도 되지만, 비용 절감을 통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 출신의 학자들에게 보다 많은 재정적 혜택을 주기 위해서였다. 숙소 또한 가급적 저렴한 곳과 대학의 기숙사를 많이 확보하여 무료로 머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미 숭실대에서는 수백명분의 공간을 제공하기로 하였고, 현재 다른 대학과도 접촉 중에 있다.
한국의 철학의 역사는 오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적절한 우리의 철학적 목소리가 무엇인가라는 것은 이번 세계대회를 준비하는 한국 철학자들의 공통적인 물음이었다. 세계대회가 세계인들과의 교류를 이루는 장이니만치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된 것이다. 그동안 서구의 철학에 대한 수입이 한국 철학계의 주된 관심이었다면 이제는 우리의 목소리를 명료히 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된 것이다. 이를 위해 ‘철학과 문화’라는 영문 논문집을 5권으로 펴내면서 그간의 연구 성과들을 점검해 보고 있으며, 아울러 우리가 고민할 철학의 다변화도 꾀하고 있다. 그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영역과 지역의 철학에 주목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한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정신의 활동을 강조한 시대들로 가득 차 있다. 물질만능주의, 천민자본주의라는 단어로 한국 사회가 수식된 것은 한국 역사의 과정에 아주 짧은, 최근의 현상으로 치유되어야 할 현상이다. 이번 세계철학대회가 철학자들만의 잔치가 아니라 이 사회가 철학의 중요성을 재삼 인식하고, 우리의 삶의 태도를 근원적으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김선욱 / 숭실대· 철학


필자는 2008 세계철학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미국 뉴욕주립대 버펄로 대학에서 ‘판단이론과 의사소통적 합리성-한나 아렌트와 위르겐 하버마스 정치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치와 진리>, <한나 아렌트 정치철학강의>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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