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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들볶일 각오한 학생들을 만나는 재미
[나의 강의시간]들볶일 각오한 학생들을 만나는 재미
  • 전종섭/한국외대·언어인지과학
  • 승인 2007.09.10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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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언어인지과학 전공 수업에서 학생들은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언어 능력에 대해 공부한다. 예를 들어, ‘심리언어학’ 시간에 학생들은 ‘사냥꾼’과 같은 단어가 한국사람 머릿속에 ‘사냥’ 따로 ‘-꾼’ 따로 저장되어 있는지, 아니면 ‘사냥꾼’ 전체가 한 덩어리로 저장되어 있는지 공부한다. 가르치는 내가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졸업 후 사회에 나가 써먹을 데 없는 내용이다. 물론 언어인지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학자의 길을 가려는 학생들도 있을 수 있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사회에 뛰어들어 먹고살 걱정을 한다.
“어디다 써먹으라고 이런 것을 가르치는가?”라는 질문은 비단 내가 가르치는 과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대학에 개설된 많은 강좌들이 세상에 나가 먹고 사는데 직접적 관련이 없는 내용들이다. 도대체 대학에서는 왜 써먹을 데 없는 내용을 가르치는 것일까? 대학 교육의 목표는 무엇일까?
나는 대학이 사회에 나가 바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외적인 전공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대학 교육이 직업 교육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보다 대학 교육의 본질은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창조적인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한국사람 머릿속에 ‘사냥꾼’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들어있건, 그 지식 자체는 써먹을 곳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머릿속에 ‘사냥’ 따로 ‘-꾼’ 따로 들어있는지, 아니면 ‘사냥꾼’ 전체가 들어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며칠 밤을 고민하며 다양한 가설을 세워 보고, 그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실험을 설계하고, 다른 사람의 연구 성과를 논문 원전으로 검토하며 장단점을 찾아보는 일련의 지적 트레이닝을 받게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러한 지적 트레이닝의 목표는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창조적인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다. 먹고사는 일은 문제와의 싸움이다. 기업의 영업직 직원은 더 많은 물건을 팔아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한다. 주식 투자자는 여러 개의 종목 중 가장 수익성이 좋은 종목을 골라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한다. 떡볶이 가게 주인은 더 맛있는 떡볶이를 만들고, 더 많은 고객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한다. 나는 강의실에서 떡볶이 가게를 운영하는 직접적인 기술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나는 학생들에게 어려운 과제를 던져주고, 학생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고통 받고, 좌절하는 것을 지켜본다.
흔히 학생들로부터 높은 강의 평가 점수를 받은 수업이라고 하면, 수강생이 구름같이 몰려드는 인기 강좌를 연상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르치는 과목들은 높은 강의 평가 점수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수강 신청을 꺼리는 편이다. 내가 한국외대 교수가 되고 나서 바로 다음 학기 인터넷 강의 계획서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계획인 학생은 수강 신청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는 도발적인 한 마디를 썼다가 해당 과목에 수강 신청자가 없어 폐강된 일이 있다. 이제는 어느새 그런 말을 쓰지 않아도 “들들 볶일 각오가 된 학생들”만 내 수업에 들어온다.
학기 초에 학생들 이름을 전부 외우고, 강의 시간에는 교실 전체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에게 질문하고 의견을 듣는다. 졸거나 핸드폰 진동 소리라도 새어나오면 공개적으로 면박을 준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공부 한번 제대로 해 보려고 독한 마음을 먹기 전에는 들어올 수 없는 수업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학생들이 “대학 공부가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라는 e-메일을 나에게 보낸다. 이런 힘든 과정 속에서 나의 학생들은 문제 해결 능력, 창조성, 도전 정신을 배워나간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게 될 기업인이 계시다면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창조적이며 도전적인 인재들이 나의 스파르타식 강의실에서 소수 정예로 길러지고 있음을 꼭 말씀드리고 싶다.

전종섭/한국외대·언어인지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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