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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한국외대 통역번역대학원 신임교수 임용 시비
[쟁점] 한국외대 통역번역대학원 신임교수 임용 시비
  • 안길찬 기자
  • 승인 2002.03.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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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05 00:00:00
교수임용에서 탈락한 지원자가 대학에 심사결과 공개를 요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우리 학계는 한 다리 건너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될 수밖에 없는 얇은 인적구성으로 이뤄진 좁은 우물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번 임용에서 탈락했다 해도 실낱같은 희망사항이지만 ‘다음기회’를 기약하기 위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유리하다. 문제가 있다해서 발설하면 요주의 인물로 ‘찍혀’ 다른 기회조차 차단될 수 있는 것이 학계의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난해 한국외국어대 통역번역대학원 한노과 교수임용에 응시했다가 고배를 마신 성 아무개·전 아무개·최 아무개 씨 등 3명이 “심사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며 최근 대학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싸움은 하나의 ‘사건’임에 분명하다.<219호, 2월25일자 기사 참조>이들은 지난달 20일, “심사가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납득할 수 없는 결과가 빚어졌다”며 대학과 법인에 심사결과 공개와 재심을 요구했다.

이들의 요구에 대해 대학측의 반응은 냉담하다. 대학은 지난달 26일, 총장명의의 회신을 통해 “학과심사 결과를 검토한 바, 심사과정과 내용에 하자가 없고, 대학의 규정상 심사내용을 지원자에게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맞섰다. 그러나 지원자들의 대응 또한 단호하다. 대학이 심사결과를 공개하지 않는 한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탈락자 3명이 공동으로 문제제기

심사과정과 지원자들의 주장, 학교측의 입장을 중심으로 이번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는 것은 혹여 대학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대학의 자율적 임용관행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다. 대학의 교수임용 문턱은 높아지고 있는데 반해, 교수가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학문후속세대들의 수는 급증하고 있다. 수요와 공급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하에서 치뤄지는 교수임용은 어찌됐든 지원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보면 3명 지원자들의 요구는 가벼이 지나칠 수 없는 학문후속세대 공통의 문제다.

● 심사과정 : 한국외국어대 통역번역대학원은 지난해 10월말 한노과의 첫 전임교수를 뽑기 위해 임용공고를 내고 총 4명으로부터 원서를 접수했다. 지원자인 성씨, 전씨, 최씨, 방씨는 한국외국어대 한노과 대학원과정을 마친 선후배관계. 전씨는 BK21 계약교수로 나머지 세 명은 통역번역대학원 시간강사로 대학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대학은 11월에, 연구실적·통역번역실적·강의경력 등에 대한 기초심사와 대표논문에 대한 외부심사, 그리고 4개 부문에 대한 공개강의 등 총 3단계 임용심사를 거쳤다. 심사위원은 학부의 한노과 교수 4명과, 통역번역대학원의 교학부장 등 총 5명이 맡았다. 논문 심사는 학과에서 추천한 인사 중 교무처에서 선정한 외부인사 4명에게 의뢰됐다. 심사를 통해 4명의 지원자 중 방 아무개씨가 최종 임용예정자로 결정됐고, 대학은 12월 인사위원회에서 방씨에 대한 면접을 거쳐 법인에 임용을 추천했다. 12월말 법인은 대학이 추천한 방씨를 한노과 전임교수로 최종 결정했다.

● 지원자들의 주장 : 공개강의까지 거친 점을 감안하면 한국외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임용 심사절차는 비교적 엄정하다. 그런데도 지원자들이 불공정성 의혹을 제기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형식적 절차는 공정했지만 각 부문별 내용심사는 불공정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 그 첫째 근거로 이들은 최종 임용예정자가 제출한 연구실적·통역번역실적·강의경력 등이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적다는 점을 들고 있다. 방씨가 제출한 연구실적은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해 총 4편인데 반해, 지원자 중 성씨는 총 9편을 제출해 두 배 상 차이가 나고, 강의경력도 수 년 이상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두 번째 근거로 이들은 자신들의 통역실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들은 “통역실적은 통상 ‘건수’가 아닌 ‘일수’로 계산하는 것이 원칙인데, 되돌려 받은 임용심사 서류에 따르면 ‘일수’가 아닌 ‘건수’를 기준으로 계산한 흔적이 역력하다”고 지적했다. 세 번째 근거로 이들은 번역실적 평가도 공정치 않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들은 “제출한 번역물 전체에 대해 고른 평가를 하지 않고, 방씨가 제출한 영상번역만을 높이 평가했다”며 심사기준이 특정 지원자에게 유리하게 짜여진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공정, 불공정 여부는 심사결과가 공개되면 명확해 질 것이란 게 이들의 주장이다.

● 대학측의 입장 : 지원자들의 심사결과 공개와 재심 요구에 대해 대학측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절차상 공정하게 치뤄진 심사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기초심사에서 공개강의까지 철저한 심사과정을 거쳤고, 학과심사 → 대학 인사위원회 결정 → 법인승인 등 법적 절차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다. 이 대학 정일용 교무처장(무역학과)은 “탈락한 이들이 심사결과에 관해 불만을 가질 수 있지만, 이미 지난해 모든 과정이 마무리된 일”이라며 “지원자들이 요구한다고 해서 대학측이 이를 공개할 의무는 없다”고 밝혔다. 그는 또 “탈락자들이 이의를 제기한 후 심사결과를 다시 검토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서 “심사에 참여한 대부분의 교수가 방씨를 1순위로 추천한 점을 보더라도 재고의 여지는 없다”고 덧붙였다.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표상용 교수(한노과)는 “대학이 정한 기준과 절차에 따라 심사가 이뤄졌고, 심사위원 전원합의를 통해 대상자를 결정했다”면서 “지원자들간에 연구실적, 경력, 공개강의에 대한 평가점수는 비슷했지만, 번역실적에서 많은 차이를 보였다”고 설명했다.

● 심사결과 공개 법적 의무 : 개정된 교육공무원임용령에 따라 지원자들이 심사결과 공개를 요구하면 대학은 이에 응해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외국어대측이 ‘이유없다’고 강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문제는 개정된 법령의 효력 발생시점이다. 임용절차가 법령의 효력이 발생되기 전인 지난해 이미 마무리됐기 때문에 대학이 심사결과를 공개할 법적 의무는 없다. 불과 며칠 차이를 두고 지원자와 대학간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원자들은 “지난해 절차가 마무리된 임용이지만 교수로서 임무가 시작되는 발령일자는 3월이기 때문에 대학으로서는 공개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심사결과 공개 사태해결 지름길

이번 사건은 사실 법령 적용 시점을 떠나 대학이 심사결과를 공개하기만 하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이다. 대학측은 심사자들의 판단을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해 결과를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그들의 판단을 존중하면서도 지원자들을 함께 이해시킬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학측은 이들의 요구를 껄끄러워 하고 있다. 문제가 제기됐다는 것만으로도 불공정 임용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칫 이일로 해서 자신들의 앞날이 고단해 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처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들의 행동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한 것이다. 학인의 길을 걷기 위해 그간 쌓아온 학문적 공든탑도 자칫하면 무너질 수 있다. 만약 대학의 주장대로 정말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심사가 이뤄졌다면, 결과를 공개하는 것이 공정성을 입증하는 방법이며 원만하게 사태를 해결하는 지름길일 것이다.
안길찬 기자 chan1218@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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