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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 부자 학교, 가난한 화장실
[만파식적] : 부자 학교, 가난한 화장실
  • 교수신문
  • 승인 2002.06.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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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6-24 19:49:05
민선주/연세대·도시건축공학부

가난한 집과 부잣집의 차이점을 가장 절실하게 보여주는 곳은 화장실이다. 얼핏 근사한 현관과 거실, 정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런 공간들은 대부분 바라보기만 해도 되는 공간들인데다가, 화장실과 같이 필수적이고 구체적인 행위들이 개입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한 동네에서는 하나 뿐인 공중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서 아침마다 줄을 선 전경을 볼 수 있지만, 잘 사는 집에는 방방마다 화장실이 따로 구비되어 있는 데다 다른 집 안방 만한 주인 화장실과 어쩌다 사용되는 손님용 화장실은 거의 갤러리와 같은 수준으로 꾸며져 있기 마련이다.
여고 친구들에게 괴짜 취급을 받으며 지원한 공대에 입학했을 때 달동네만도 못할 정도로 공대 건물 내에는 여자화장실이 없었고, 78년 당시 나는 동기 학생들에게 화장실 다녀오는 내색조차 하기 부끄러운 여학생이었다. 쉬는 시간에 재빨리 학생회관까지 뛰어갔다 오다가 엎어져 무릎에 반창고까지 붙이고 다니는 ‘여자답지 못한’ 여학생이었다. 그래도 “남의 집 귀한 아들 자리 빼앗고 들어와서… 졸업하면 시집이나 갈 것을…”이란 얘기가 현실이 될 것 같아, 졸업하기 전에 미국 구경이나 하고 시집가야지 한 것이 모교에서 가르치는 자리까지 오게 됐다.
다시 돌아온 학교에는(곧 각층마다 여자화장실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격층으로 여자화장실이 배치돼 있어, 엎어지지는 않지만 여전히 아래층이나 위층으로 급히 다녀와야 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은 여자 화장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화장실도 마찬가지이다. 경제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발전하면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이 화장실의 악취가 사라지는 것이고, 그 다음 화장실에 휴지가 갖춰지고,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남자의 뒷모습이 밖에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문화적 공간의 기본이 갖추어진다. 이는 겉에서 보이는 화장실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화장실을 통과하는 설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고, 화장실 공간이 여유 있게 설계돼 입구에 중간 영역이 생기고, 화장실뿐만 아니라 건물 전체를 유지, 관리하는 시스템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화장실의 현실은 어느 누구만의 책임도 아니면서,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문화는 앞에 ‘보여지는 것’이 우선되는 문화였고, 교문과 강당, 전시실, 회의실과 같은 ‘드러난 공간’들이 우선되는 문화였다. 어느덧 우리나라도 위의 드러난 공간들이 검소하게 마련되고, 화장실과 쓰레기 처리장, 허드레 공간과 같은 버려진 공간들이 잘 갖추어질 때 그 전체가 돋보인다는 것을 인식하는 문화권으로 돌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현상은 도시 환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제한된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대기업 사옥의 근사한 화장실에 비해서, 일반 보행자들은 공중 화장실은커녕 당구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의 냄새나는 화장실(그것도 어쩌다 자물쇠가 없는)을 몰래 사용해야만 했다. 이제는 우리 도시 환경에서도 자가용이 없는 보행자들이 근사하게 공중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 문화가 시작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불만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극히 단편적인 부분이지만, 동시에 전체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화장실 문제들이 점차 해결돼가면서, 단지 여성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공과대학의 다른 교수들과 달라서 불편함을 느껴야 하는 현재 상황도 점차 변화해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단지 남자 양복을 입지 않고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는 사실에, 머리가 길거나, 같이 술을 마시지 ‘못’한다거나 하는 차이점에 불편해해야 하고, 여성에 관한 아주 점잖은 농담에 대해서도 어떻게 답을 해야할 지 망설이는 척 해야 하는 것이 다음 여성 세대들을 준비하기 위한 어설프면서도 조심스런 현재의 입장이다.
부자 유럽 축구계에서 가난한 한국이 한 자리를 차지하였듯이, 부자 남성 사회에서 가난한 여성 공간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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