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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공인이 공화정을 가능케 한다
진정한 공인이 공화정을 가능케 한다
  • 윤평중 한신대·정치철학
  • 승인 2012.04.17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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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공인의 덕목’ 설문조사 결과를 보고

윤평중 한신대 교수
‘정치의 해’를 맞아 시행된 이번 설문조사는 시의적절 했다. 현대 민주정치의 꽃인 선거가 국가의 존재 이유인 ‘공적인 것’의 의미와 공인의 정체성을 돌아보는 좋은 계기이기 때문이다. 보수 승리-진보 패배를 낳은 4·11 총선 결과도 대표적 공인인 정치인의 자질과 연결된 정치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반성을 불가피하게 한다. 공인의 덕목에 대한 성찰이 한층 긴박한 중요성을 갖는 이유다.

<교수신문> 설문은 공인을 ‘1차적이고 우선적인 존재의 이유가 공적 목표의 증진에 있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이런 규정은 너무 방만해진 공인의 경계를 보다 분명하게 한다. 현대 대중사회에서 갈수록 영향력을 넓혀가는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 같은 유명인(Celebrity)을 공인의 범주에서 제외함으로써 더 엄밀한 철학적 성찰이 가능해진다.

말 자체에서 보듯 공인과 公共性은 서로 분리 불가능한 짝 개념들이다. 정치규범과 함께 정치현실에서도 민주주의가 당연시되는 우리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공인의 우선적 존재 이유가 ‘공적인 것’을 위해 일하며 공공성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 있다는 점과, 대부분의 현대국가가 공화정(Res Publica, 공적인 것)을 표방한다는 사실은 서로 긴밀히 이어진다. 우리 시대의 공인은 무엇보다도 현대 공화정을 대표하는 공적 시민이 아닐 수 없다.

설문조사 결과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선명히 보여 준다. 예컨대 고위공무원에게 청렴이 가장 필요하다는 답이 압도적 1위다. 퇴직 후 연금까지 포함한 생애소득의 관점에서 공직의 공식 수입이 민간 평균을 훌쩍 넘는 상황은 고위 공직자들의 청렴 의무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더 노골화된 공직 부패와 만연한 전관예우 앞에 이런 요구는 공염불로 전락했다. 일부 공무원의 부패는 이들이 공무원이 아니라 사사로운 이익을 앞세우는 私務員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고대 아테네의 타락을 보면서 대안을 꿈 꾼 플라톤이 이상국가의 지배 엘리트에게 사유재산을 금지한 것은, 물론 과도한 것이기는 했지만, 정확히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사사로움의 핵심이 사유재산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온다는 이치를 간파한 것이다. 스승의 이상국가론을 비판한 아리스토텔레스도 공적 의무를 경시하면서 경제적 이득 추구(Res Privata, 사적인 것)에 골몰하는 사람을 인간다운 자질을 결여한 열등한 존재(Idiotes)로 비판한 바 있다.

직위와 권력을 이용해 끼리끼리 봐주면서 치부하는 자들이 공정하게 일을 처리할 리 없다. 고위공무원과 법조인의 태도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 공정성이라는 조사결과도 이런 뜻으로 읽힌다. 이것은 국가, 즉 정치공동체의 근본적 존재 이유가 공정성을 보장하는 데 있다는 규범적 요구와 직결된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 목표였던 공정사회론이 대다수 시민들에게 냉소의 대상이 돼 온 상황에서 사회정의를 다룬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고위공무원의 청렴과 법조인의 공정성, 정치인의 준법성이 가장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청와대와 국회, 검찰과 법원 같은 국가의 핵심 공적기구가 시민들로부터 불신 받는 것은 자연스럽다.

기업인에게 가장 필요하면서 동시에 가장 부족한 덕목으로 공동체 의식이 선정된 것도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국가의 전폭적 지원과 국민의 희생 위에서 대기업의 전성시대가 가능했다는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채 ‘국가 안의 국가’처럼 행동하는 재벌의 전횡과 폭주에 대한 따끔한 지적이 포함된 것임은 물론이다. 이는 기업이 이윤 창출과 일자리 만들기의 수준을 넘어선 사회적 책임에 눈을 돌려야 하며 윤리경영을 녹여 낸 고차적 시장경제를 모색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교수에게 압도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 전문성인 것은 당연하다. 지식생산의 주체인 교수의 존재 근거와 직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교수에게 가장 부족한 덕목으로도 전문성이 선정됐다는 사실이다. 이는 활발하게 사회 참여를 하면서 널리 알려진 교수 가운데 상당수가 학문성을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터이다. 안타깝게도 교수의 대중적 명성과 학문적 성과가 일치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또 하나 흥미로운 대목은 교수들 스스로 공인의식이 가장 뛰어난 집단으로 교수를 뽑았다는 사실이다. 법조인과 고위공무원에 비해 교수의 공인의식이 두 배를 넘는다는 답이 나왔는데, 만약 평가자가 교수들이 아니었더라도 이렇게 후한 점수가 나왔을지는 의문이다.

공인의식이 가장 부족한 집단으로 뽑힌 건 단연 정치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터이다. 대통령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으로 선정된 것은 소통 능력, 통찰력, 신뢰, 갈등·이해관계 조정, 정직 등의 순서다. 이는 정확히 현재의 대통령 리더십에서 缺落된 것들이기도 하다.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 행태가 시대적 反面敎師로 투영되고 있는 상황의 ‘안철수 현상’은 이런 맥락의 산물이다.

전체적으로 공인 가운데 언론인이 빠진 것과, 평가 주체가 교수로 한정된 건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진정한 공인이 공화정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이번 설문조사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 대한 냉철한 인식 위에 민주공화정의 앞날을 찾는 ‘우리 시대의 지도 그리기’임에 틀림없다.


윤평중 한신대·정치철학
미국 남일리노이 주립대에서 「합리성과 사회비판: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급진자유주의 정치철학』, 『담론이론의 사회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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