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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미숙한 공동체와의 관계 맺기
아직은 미숙한 공동체와의 관계 맺기
  • 박광주 부산대·정치학
  • 승인 2012.04.1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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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공인의 덕목’ 설문조사 결과를 보고

박광주 부산대 교수
한국사회는 산업화 단계를 거쳐 정보사회에 진입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급속도로 분화와 전문화를 경험했다. 복잡사회가 된 것이다. 이른바 압축성장을 경험하면서 전통적인 농업사회로부터 산업사회, 정보사회로의 이행이 초고속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급속하게 증식된 역할과 기능이 공동체와의 유기적 연관성을 맺고 정착하는 데에 여전히 미숙함을 드러내고 있다. ‘가치와 안정성를 획득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제도화가 아직 미흡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공인이라 칭할 수 있는 대표적 집단인 고위공무원, 교수, 기업인, 법조인, 정치인들이 과연 얼마나 공동체와 유기적 연관성을 맺고 있는가, 얼마나 제도화 돼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이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다.

해방 이후 조선총독부의 유산을 안고 출발한 대한민국 관료제는 인구 증가와 경제성장에 걸맞게 급속하게 팽창, 성장했다. 특히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 정책을 추진해오는 과정에서 관료제의 역할과 권한은 지속적으로 확장됐다. 건국 이래 지속된 권위주의 통치 하에서 억압되고 위축된 시민사회의 위상과 대조적으로 규모와 권한의 양면에서 성장을 거듭해온 한국관료제는 이제 한국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그러나 그 지배력이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건국 이후 가장 괄목한 만한 변화를 찾는다면 아무래도 경제 부문일 것이다. 60년대 이래 지금까지 역대 정부가 가장 주력해 온 것은 경제성장, 또 경제성장이였음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얘기다. 이 과정에서 기업의 숫자나 규모는 비 온 뒤 버섯 자라듯이 급증해 왔다. 자본의 영점 상태에서 출범한 대한민국이 이제 자본가들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동안 역대 정부의 경제성장 제일주의라는 우호적 분위기하에서 마음껏 활동영역을 확장해 온 기업인들은 이제 자신들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고 있다고 말하는 위치에 있다.

조직화된 사회를 통제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기본적인 요구다. 예로부터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 같은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 오늘날 법조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질서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권력이 만든 질서를 유지하는 데 역할을 하는 기능인들이다. 문제는 어떤 권력이 만든 질서인가 하는 것이다. 민중을 억압하는 권력이 만든 질서인가 아니면 민중자신이 만든 질서인가 하는 것이다. 건국 이후 40년 넘는 세월을 전자의  질서에 속박되었다가 후자의 질서로 바뀐 것은 이제 겨우 십수 년이다. 한국의 법조인들이 이 같은 변화에 과연 얼마나 제대로 적응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에서 정치는 어떤 의미로 이해되고 있는가? 대한민국에서 정치인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해하여야 할 사실이다. 그들에게 있어 정치란 ‘A가 B에게 B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A가 원하는 바대로 움직이게 하는 힘’, 즉 권력인가. 아니면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권위주의적인 것과 구분되는) 배분과정’인가. 만일 전자라면, 정치인들은 바로 스스로를 지배 권력의 일부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후자라면, 정치인들은 사회 내의 여러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전문가로서의 자기 위상을 설정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시간보다는 권위주의의 시간을 훨씬 더 많이 경험한 대한민국에서 끊임없이 생존해 온 정치인들이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이제 우리들 자신으로 돌아와 보자. 4년제 대학이라고는 오직 경성제국대학 하나였던 것이 불과 67년 전의 일이다. 이제 전국에 4년제 대학이 넘쳐나고, 대학 진학률은 선진제국의 그것을 훨씬 넘어 세계 제일이다. 대학이 존재하는 곳에 대학교수가 있다. 대학의 급속한 팽창(성장이 아닌)은 대학 교수의 급속한 팽창을 동시에 의미한다. 중세 이래 면면히 발전해 온 서구의 대학과 달리 20세기 초반에 비로소 도입된 서구식 대학의 급속한 팽창이 한국의 현실이라면, 과연 대학을 채우고 있는 대학교수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지식인인가? 지성인인가? 인텔리겐치아인가? 아니면?

대학교수들이 스스로를 포함해서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공인집단에 대해서 생각하는 공인의 덕목은 어떤 모습인가? 500명이 넘는 전국의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이번 설문조사는 응답자의 연령이나, 직급, 그리고 이념적 성향의 면에서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 다만 전공분야에 있어 인문 사회계열에 치우친 측면이 있으나, 이번과 같은 설문조사에 대한 관심이 이 분야의 교수들에게 특히 높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번 조사 결과를 한국의 대학교수들이 보는 공인의 상이라고 일반화시켜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고위공무원들에 가장 필요한 덕목으로서 지적된 것은 인성 면에서는 청렴, 태도 면에서는 공정성, 그리고 능력 면에서는 소통능력이다.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위를 점유하고 있는 고위공무원들이 여타의 어떤 자질보다 이들 자질들을 더 많이 갖출 것을 요구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덕목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청렴이다. 이 말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오늘날 고위공무원들에게 청렴성이 가장 결핍돼 있다는 말이 된다. 공복으로서 시민봉사를 제대로 하기 위한 공정한 업무 처리와 소통능력이 중요하다고 지적하면서도, 그보다 더 필요한 덕목이 청렴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급속한 관주도 경제성장 과정에서 한국의 관료들은 지대 추구에 너무나 맛을 들였다. 부정부패는 이제 한국사회가 가장 혐오하는 대상이 됐다.

기업인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바람직한 인성은 책임감과 신뢰다. 그리고 추진력이 바람직한 능력으로 지적되고 있다. 모든 사업은 본질적으로 벤처사업이다. 신뢰성이 있고 책임 있는 자세로 추진력을 발휘할 때에만 기업은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기업인들이 갖춰야 할 태도로서 가장 중시되고 있는 것이 공동체 의식이란 사실이다. 기업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덕목이 공동체의식이라는 조사 결과와 결부시켜 이 같은 의외의 사실을 이해해 본다면, 오늘날 한국의 기업가들이 왜 그람시적 의미에서 부르주아 헤게모니를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는가가 잘 설명된다.

조세 포탈, 정경 유착, 노동 탄압, 부동산 투기, 외화 유출 등의 사회적 범죄가 있을 때마다 언급되는 한국의 기업가들과, 생전에 거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워런 버핏과 함께 상속세 더 내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빌 게이츠를 위시한 억만장자들, 그리고 복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소득세 부담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유럽의 자산가들은 날카로운 음영의 대비를 이루고 있다.

법조인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인성은 정직과 신뢰다. 태도로는 공정성이 요구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갈등·이해관계 조정의 능력이 요청되고 있다. 분쟁을 조정하고,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법조인들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자질들이다. 법이 정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집행하는 자들이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 되고, 그럴 때에만 공정한 조정이 뒤따를 수 있다.

이 같은 덕목 중에서도 가장 중시되고 있는 덕목은 공정성이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오늘날 공정성이 법조인들에게 가장 결여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랜 권위주의 통치와 짧은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법조인들의 체질 개선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정치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는 신뢰다. 태도적 측면에서는 준법이 요구되고 있다. 능력의 면에서는 소통능력과 갈등·이해관계 조정 능력이 가장 필요하다고 지적됐다. 이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지적된 것은 갈등·이해관계 조정능력이다. 정치를 권력이 아닌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 과정으로 이해하는 분위기가 한국 사회에 정착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조사결과다.

정치인들에게 가장 결핍된 덕목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신뢰다. 신뢰받지 못하는 정치인, 이것이 오늘날 한국정치사회의 문제다. 법을 만드는 주체이면서 탈법적이며, 소통과 공정한 갈등 이해 조정에 실패하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신뢰란 있을 수 없다.

교수들이란 원래 자신에 대한 평가보다는 타인에 대한 평가에 능한 존재다. 이점에서 여타의 공인집단에 대한 그들의 평가에는 귀를 기울일 만하다. 그렇다면 교수 자신들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 교수들에게 가장 필요한 인성은 신뢰와 책임감, 가장 필요한 태도는 합리성, 그리고 가장 필요한 능력은 전문성이라는 답이 나왔다. 학문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사항들이라 하겠다.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성이며 현재 가장 부족한 것도 전문성이라는 지적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성장이 아닌 팽창을 거듭해 온 한국대학의 실상과 이는 무관하지 않다. 전문성을 결여한 교수는 스스로의 존재 기반을 상실한 존재다.

교수들이 스스로의 약점을 제대로 짚어낸 이번 조사를 통해 교수는 내 눈에 박힌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 이점에서 공인의식이 가장 뛰어 난 집단으로 교수집단을 든 것은 신뢰할 수 있다. 그리고 교수들이 공인의식이 가장 부족한 집단으로 정치인을 들었다는 사실에도 무게가 실린다. 정치인에 이어 기업인들이 거명됐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신뢰가 결핍된 집단, 공동체 의식이 결핍된 집단으로 이들 두 집단이 일찌감치 지목된 바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이번 조사의 덤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우리들의 관심을 가장 끄는, 공인 중의 공인이랄 수 있는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자질을 살펴보자. 가장 요구되는 덕목으로 단연 소통능력이 꼽히고 있다. 그것에 뒤이어 요구되고 있는 것이 통찰력, 신뢰, 갈등·이해관계 조정 능력 등이다. 이 모두는 현재 우리의 경험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올 해가 바로 대선의 해이라면, 당장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에서 반면교사를 구하는 것이 극히 당연하다.


박광주 부산대·정치학
미국 텍사스대(오스틴)에서 박사를 했다. 『한국 권위주의 국가론: 지도자본주의 체제 하의 집정관적 신중상주의 국가』, 『한국정치: 전개와 전망』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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