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9:45 (금)
“개념사와 은유학의 조합, 한국의 근대성 재조명 가능”
“개념사와 은유학의 조합, 한국의 근대성 재조명 가능”
  • 이행훈 한림대 한림과학원·한국철학
  • 승인 2012.06.12 11: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2년 한림과학원 ‘개념사의 이론과 방법’ 학술대회

개념이 역사적으로 이해되듯이, 역사는 그 개개의 개념들을 통해 해석된다는 코젤렉의 역사적 의미론은 해석학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것이다. ‘동아시아 기본개념의 상호 소통’을 연구하는 한림대 한림과학원 HK사업단은‘개념사의 이론과 방법’을 주제로 지난달 31일 한림대 일송기념도서관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는 개념사를 둘러싼 서양의 대표적 철학자들의 이론을 중심으로 개념사의 사상적 배경, 개념사와의 접합점과 논쟁점을 동시에 짚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한림대 한림과학원에서 '개념사의 이론과 방법'을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하고 있다.

개념사에서 다루는 개념은 담론과 구분되면서도 양자 모두 언어학적 방법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공유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허경 한국근현대문화사상연구소 연구원은「미셸 푸코의‘담론’개념─에피스테메·언표·장치·놀이와의 대조」에서, 담론 개념이 푸코의 사유 안에서도 복잡한 층위의 다양한 변화를 겪었음을 조명했다. 언어학적 혹은 광의의 구조주의적 접근 방법에서 담론이라는 개념으로 지식과 권력의 상관관계에 주목했던 푸코는 197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장치·실천·놀이 등으로 분석 개념을 이동했다. 에피스테메, 언표, 장치, 놀이 등으로 이어지는 개념은 모두 푸코에 의해 철학행위와 동일시되는 진리놀이의 개념 아래 포괄된다는 것이다. 이를 근대 혹은 근대성 논쟁에 적용해보면, 결국 우리의 근대란 근대(성) 개념을 선취하기 위한 주체 간의 일종의 게임으로 해석 가능하며 여기서 개념사의 방법과 접속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전통에서 바라 본 개념사 연구의 가능성

학제적 연구의 하나로 추진돼온 개념사 연구는 최근에 언어학, 특히 구조의미론과 텍스트언어학 및 인지의 미론 분야에서 시의적인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박여성 제주대 교수(독일학과)는「개념사 연구: 역사학과 언어학의 상호작용─구조의미론, 텍스트언어학 및 인지의미론을 중심으로」에서, 역사의미론의 인식적 토대와 방법론적 쟁점을 요약하고, 이를 토대로 기본개념을 설정하는 의미론과 통사론, 텍스트와 화용론의 층위에서 다루는 방안을 모색했다. 담론과 역사의 층위에서 기본개념에 대한 인지의미론적 틀과 원형성을 사유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은 이론언어학의 협소한 영역을 벗어나 개념사 연구와 접목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특히 개념사 연구에서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빌레펠트 사회학파의 거두 루만의 체계이론과 개념사 연구의 상관성을 밝힌 것은 의미있는 성과이다.

가다머는 “개념사의 과제야말로 철학사 연구의 보충작업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수행과정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이며 철학 그 자체로서 실현돼야 하는 것”이라고 언명한 바 있다. 정연재 세종대 초빙교수(교양학부)는「철학적 해석학과 개념사」에서, 가다머가 주장하는 ‘철학으로서의 개념사’가 어떤 것인지, 그 의도와 사상적 배경을 밝혔다. 가다머에 따르면 개념사 연구야말로 철저하게 광범위한 언어적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일상적 언어 사용과 개념 형성의 관계뿐만 아니라 개념이 인간의 언어적 삶에 유입돼 벌이는 역동적인 개념적 수행을 동시에 밝히는 작업을 의미한다.

블루멘베르크에 따르면, 은유는 개념보다도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지닌다. 은유의 역사적 변화는 그 자체로 역사과정의 의미 지평과 관찰 방식의 메타 동학을 생생하게 드러내주는데, 그 안에서 개념들이 변이를 겪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용수 고려대 강사(철학과)의「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은유이론」과 박근갑 한림대 교수(사학과)의「근대의 의미론: 코젤렉과 블루멘베르크」는, 국내에서 연구가 많지 않은 블루멘베르크를 개념사 연구의 현장으로 이끌어 냈다는 점만으로도 의미있다.

강용수는 블루멘베르크가 은유의 세 가지 기능에 주목해 ‘절대적 은유’라는 개념을 만들었다고 한다. 첫째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수사적 기능이고, 둘째는 개념으로 기술되지 못한 부분에 대한 보완으로써 개념의 대리물이며, 셋째는 개념으로 대체되거나 제거될 수 없는 은유만이 수행할 수 있는 고유한 기능으로 ‘절대적 은유’이다. 이처럼 세계와 인간을 매개하는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인 은유이론은 근대 동아시아에서 진행된 개념의 창조와 번역 및 유통의 역동적 수행을 분석하는 데 유효한 방법이 될 듯하다.

박근갑 교수는 개념사가 ‘근대’의 역사서술 공간을 확장했으며 인식론의 영역에서 자기성찰의 계기를 얻는데 기여한 점을 평가하면서도, 기본개념이 지닌 이중성에 개념사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 해답의 실마리를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은유이론에서
찾았는데, 은유가 ‘개념형성의 앞마당’에서 기능한다는 점에서 전통적 요소가 강한 동아시아 개념 유통의 실체를 밝히는 데 블루멘베르크의 은유이론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봤다.

역사적 의미론의 또 다른 방법‘은유이론’

한 사회가 계몽의 시간을 보다 늦게 경험할수록, 근대적 개념형성의 저변에는 보다 많은 전통요소가 잔존할 수밖에 없고, 이때 개념의 다의성과 관련해 은유의 의미 지평은 보다 생생하고 원초적인 역사로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개념사와 은유학의 명제들이 서로 보완하면서 긴장관계에 선다면, 한국의 근대성과 역사적 의미론을 읽어내는 데 새로운 발견적 예언의 생성도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개념을 통해 역사를 읽어내는 작업이 지닌 특징은 하나의 개념을 고정적인 실체로 이해하지 않는 데 있다. 개념은 바로 이 순간에도 일상세계에서 언어를 통해 주체와 세계를 매개하면서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다. 중국근대의 계몽사상가 위원은 아편전쟁 후 편찬한『해국도지』에서 서양을‘以夷制夷’를 위한 도구로 삼았지만, 이때 수용된 새로운 개념들은 역설적으로 중국을 급속한 속도로 근대 세계로 이끌었다. 이를 역사의 우연성으로 볼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일지라도 그 과정에서 발생한 전통적 사유와 개념이 근대적 개념에 미친 영향을 밝히는 일은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행훈 한림대 한림과학원·한국철학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박사를 했다. 「신구 관념의 교차와 전통 지식체계의 변용」, 「동서양 역사 속의 소통과 화해」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