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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공부를 학문이라 할 수 있을까
어떤 공부를 학문이라 할 수 있을까
  • 김풍기 강원대·국어교육과
  • 승인 2012.06.19 1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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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의 ‘학문론’은?

學問이란 배우고 묻는 행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배우고 묻는 행위는 인류를 인류답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면서 인류의 존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학문을 함으로써 인류는 자신만의 삶을 구성했고, 어제보다는 더 아름답고 행복한 나날을 만들려고 애를 써왔다. 지식의 축적, 지혜의 발현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풍성하게 만들어왔다면, 그것은 상당 부분 학문 행위에 기대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고 가족의 아름다운 삶을 꿈꾸며, 나아가 사회와 국가, 인류사회의 평화로운 공존을 이야기하는 것은 개인의 행위조차도 자신만의 것이 아닌 온 우주의 운행과 질서에 이어져 있음을 자각하는 일이다. 학문은 바로 그런 맥락을 잊지 않는 자리에서 성립해야 한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왜 공부를 하느냐고 물으면 다양한 대답을 내놓겠지만, 큰 범주에서 보자면 행복한 삶의 구현에 있을 것이다. 학문을 통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학문이요 인류의 발전이 아니겠는가. 선학의 가르침 익히고 학문지형도 그려야 무엇이 행복이고 발전인가. 그 개념이나 범주는 시대마다 혹은 지역마다 달랐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롭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억압과 추함으로 가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행복이나 발전과 같은 개념도 각 시대와 공간 속에서 언제나 재구성되는 것이라는 의미다.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에서도 다양한 학문론이 제기됐다. 불교나 유교, 도교와 같은 곳에서도 학문방법론을 고민해왔지만, 각 시대의 뛰어난 학자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진정한 학문의 길로 인도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어떤 학문이든 두 가지 점을 근간으로 삼았다.

첫째는 근본 텍스트와 先學의 연구 업적을 충실히 학습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시대와 관련해 새롭게 학문적 지형도를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학문의 출발점에서 텍스트에 대한 엄정한 학습을 중시하지 않는 분야는 없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승과 제자가 얼굴을 맞대고 함께 묻고 배우는 것일 터이다. 공자가 그러했고 석가모니가 그러했으며 수많은 선승들과 위대한 유학자들이 그렇게 공부를 했다.

선불교에서 화두 참구와 함께 자신이 도달한 경지를 확인 받는 선문답이라든지, 유학자들이 스승과 함께 공부하던 講學에서 그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성립된 어록을 읽으면서 느끼는 묘한 긴장감은 학문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애정,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몸짓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누구나 얼굴을 맞대고 공부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마치 먼 옛날 스승의 얼굴을 지금 마주하고 공부하듯이 어록을 마주하며, 그들 사상의 흔적을 깊게 남기고 있는 경전을 읽는다. 문제는 어록이나 경전을 구성하는 언어의 체계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해되기 어려워지거나 의미의 변화를 겪는다는 사실이다.

문자의 의미 전달력이 완벽한 것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문자에 의지해야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모순된 현실은 텍스트와 의미 사이에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내고, 우리는 그 차이를 넘어서서 원래의 의도 혹은 진실에 접근해야만 한다. 훈고학 혹은 고증학, 주석학 등과 같은 방대하면서도 엄정한 분야가 탄생하는 것은 바로 그런 맥락 때문일 것이다. 텍스트의 뜻을 배우고 스승에게 물어서 밝히는 행위야말로 학문의 근간이다(최한기, 『人政』 권 15). 주희의 방대한 주석 작업, 퇴계와 율곡 이후 치열한 성리학 논쟁, 정약용의 방대한 저술 등 기본 자료를 만들고 분석하는 작업은 당대의 지적 수준을 높이는 계기였다.

이렇게 축적된 선학들의 연구 성과를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고 좀 더 깊은 학문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학문의 요체, 일상생활 행동의 일치 그러나 이것이 학문의 모든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해야 한다. 학문을 통해 학자는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전의 성과를 자신의 토대로 삼아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知行合一을 주장하지 않은 학자가 어디 있겠는가마는 앎의 범주나 행함의 방향에 대해서는 시대와 공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학자 개인이 처한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학문을 통해서 진리라고 믿는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동시에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그 길이 옳은 길이니 함께 가자고 강력하게 권유한다. 그런 삶의 바탕에 바로 학문의 강력한 힘이 자리하고 있다.

근대 이전의 지식인들에게 학문이란 일상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사상적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선학들은 학문을 평생 동안 해야 한다는 점과 일상생활에 직결돼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이가 『擊蒙要訣』에서 말한 바, “학문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 학문의 요체는 일상생활에서의 인간 행동이 가장 적합한 상태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에서 그들의 학문관을 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修己治人을 기본 종지로 하는 유학의 처지에서 학문이란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어야 했다. 학문을 통해서 자기 명성을 드높이려 한다든지, 개인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학문의 목표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했다.

요점은 자기를 위한 학문[爲己之學]을 해야지 남을 위한 학문[爲人之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황에 의하면 “자기를 위한 학문이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만 하는 것을 공부하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지만, 남을 위한 학문은 헛된 지식을 쌓아서 자기와 남을 속이고 명성과 칭찬을 구하기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일상생활에서의 행동이 공부와 어긋나지 않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늘의 이치에 통하게 되는 것이 바로 진정한 학문이라는 것”(曺植)이다. 공부의 내용은 다를지언정 선불교가 지향하는 공부 역시 이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세상의 무수한 책들을 포함해 자신의 스승을 앞에 두고 치열하게 공부하는 삶이야말로 학자들이 꿈꾸는 생활이지만, 그것의 목표는 나의 삶,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 공부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느냐는 비아냥거리는 물음에도 언제나 변화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학자의 소임이요 자세이기도 하다. 『논어』를 읽었다면 내 삶이 그만큼 바뀌어야 비로소 『논어』를 읽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이의 언설은 공부의 목표를 여실히 보여준다. 지금보다 더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나를 바꾸고 주변 사람들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지 않는 공부라면 과연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김풍기 강원대·국어교육과

고려대에서 고전문학으로 박사를 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 전기 문학론 연구』,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옛시에 매혹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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