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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인 생각의 가장자리를 파고드는 철학자 … 총체성 파악 강조
현실적인 생각의 가장자리를 파고드는 철학자 … 총체성 파악 강조
  • 이택광 서평위원/경희대·영미문학이론
  • 승인 2012.07.16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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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방한 토론회 무엇을 남겼나

몇 달 전 저녁 무렵에 한 통의 전화가 날아들었다. 멀리 슬로베니아 루블라냐에서 건너온 목소리가 휴대폰 전자음을 타고 전해졌다. 지젝이었다. 일전에 인터뷰 때문에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는데, 역시 주도면밀한 성격답게 내 연락처를 기록해뒀다가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어떤 학술단체가 그에게 기조강연을 부탁하고 싶어 했는데, 그 때문에 중간에서 그 단체와 지젝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려고 몇 번 이메일을 보냈던 것이 발단이었다. 지젝은 그 단체 초청에 응하지 않았고, 그래서 상황은 종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젝이 따로 연락을 취해온 것이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이념’ 컨퍼런스를 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공산주의의 이념’ 컨퍼런스는 바디우와 함께 매년 진행하는 이론적인 학술대회였는데, 이번에 아시아에서 개최하고자 노력 중인 것 같았다.

당연히 한국은 최적이었다. 중국과 북한이라는 ‘역사적’ 공산주의 국가의 중간에 놓여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도 상징적이었으니 말이다. 지젝은 중국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가졌는데, 자신의 발표문을 검열하고 수정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이런 중국에 비한다면 훨씬 개방적이라고 판단하는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촉급해서 이 계획은 다음으로 미뤄졌고, 사전 답사 겸 지젝이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어떤지 의견을 물어봤다. 지젝은 흔쾌히 승낙했다.

티셔츠 바람으로 남대문 돌아다니기도

지젝 정도 되는 철학자가 조용히 왔다가는 것도 이상한 일이라서 일체 경비를 자기가 부담하겠다는 것을 만류해 초청자를 찾았고, 거기에 맞춰 특강을 부탁했다. 경희대와 아트앤스터디가 초청 특강을 준비하고 경비를 나눠서 부담하기로 했다. 아트앤스터디는 한 의류회사를 섭외해서 이번 행사를 주최했는데, 그 회사에서 체제비 전부를 후원했다. 논란은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수익이 발생하지도 않는 이런 행사에 협찬을 결정했다는 점에서 감사한 일이다.

 

현 사상계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며 종횡무진의 글쓰기를 보여주는 슬라보예지젝
특강 이외에 지젝이 하고 싶어 했던 것은 한국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장소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비무장지대와 쌍용차 대한문 분향소가 이런 이유로 선택됐다. 지젝의 부탁은 어떤 학술단체나 정부기관도 자신의 방한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었고, 그래서 독립적으로 일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공식만찬이나 격식을 갖춘 의전 같은 것들은 지젝 본인의 요청으로 모두 생략했다. 방한해서 티셔츠 바람으로 남대문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만 원짜리 바지를 사는 ‘자유’를 그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장소만 찾을 것이 아니라, 활동하는 지식인을 만나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취지에서 진보의 이념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진보신당 대표 홍세화와 꾸준하게 공공미술영역에서 성과를 내온 설치미술가 임민욱을 내가 추천했다. 홍세화와 함께 진보정당에 대한 지젝의 고민을 들어보고, 다음에 출간할 예술 관련 책에대한 대화를 임민욱과 나눌 수 있도록 준비했다. 둘다 평소 한국 사회에 대해 치열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은 분들이기 때문에 훌륭한 대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알찬 결실을 맺었다는 생각이다.

방한 이후 첫 번째 일정은 홍세화 인터뷰, 비무장지대 방문이었다. 비무장지대에서 지젝은 도라산역을 보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여기에서 금방이라도 평양행 열차를 타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한 꿈을 표현한 조형물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 깊은 말을 했다. 지젝의 사유는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철학적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우리 생각을 대신하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들과 농담들이 동행하는 내내 그의 입에서 폭포처럼 쏟아졌다.

두 번의 강연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총체성에 대한 파악’이었다. 이데올로기는 이런 총체성을 파악하기 위한 함축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작동원리를 분석하는 것은 인식의 문제에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이다. 총체성은 수미일관하지도 않고 매끄럽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따라서 어떤 현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그 현상과 관련된 모든 증상과 적대, 그리고 비일관성까지도 전체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분석이다.

‘농담하는 지젝’, ‘정치적인 지젝’

그러나 지금까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이 보여준 것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어떻게 수리해서 다시 쓸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이런 방식의 대응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물론 이런 생각에 대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할 수는있을 것이지만, 지젝은 현실적인 생각의 가장자리를 파고드는 철학자이기 때문에 이런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이 적절한지 의구심이 든다.

출국 하루 전날 지젝은 두 가지 일정을 소화했는데, 쌍용자동차 방문과 그 현장에서 이루어진 임민욱 인터뷰였다. 둘 다 한국 사회에 대한 지젝의 관심을 반영한 행사였다. 쌍용자동차 분향소에 분향하고 절까지 올렸던 지젝은 출국할 때 쌍용자동차 캠페인 티셔츠를 입겠다고 약속했는데, 다음날 출국장에서 어김없이 그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모습을 보면 겉으로 보이는 ‘농담하는 지젝’ 뒷면에 진지하게 전략을 고민하는 ‘정치적 지젝’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지젝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입장을 경청하고 그에 대한 위로와 제안을 남겼다.

곧 이어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진 임민욱 인터뷰에서 지젝은 정치와 예술에 대한 흥미로운 생각들을 풀어놓았다. 임민욱은 한국의 정치상황을 설명하면서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와 정치적 선택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지젝은 한국의 경우 어떤 정부를 선택하는지 중요한 문제일 수 있기 때문에 선거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인을 선출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이런 지젝의 발언은 장기적 전망과 함께 현실적인 사안들을 그때마다 해결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평소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예술에 대한 논의를 아꼈던 지젝은 임민욱 인터뷰에서 ‘혁명적 정치성을 실험하고 경험하게 해줄 수있는 행위’라고 공공예술의 중요성을 거론했다. 이에 대한 논의들이 다음에 출간할 책에 담길 예정이라고 밝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하겠다.

이번 지젝 방한은 공식적인 단체나 기관의 초청이 아니라 본인 자신이 원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항공료와 체제비 이외에 일절 후원을 거절한 그의 태도도 고려해볼 사항이다. 지젝이 방한하고자 했던 목적은 ‘공산주의의 이념’컨퍼런스를 한국에서 개최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국 사회가 이 위험한 철학자들을 불러서 공산주의에 대해 논하는 자리를 허락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젝의 판단은 아직 유보적인 것 같다. “자신은 바디우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에 있는 지젝의 지인 중 한 명으로서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는 판단이다. 그 뒤에 있을 일은 나도 모르겠다.

이택광 서평위원/경희대·영미문학이론
영국 쉐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다양한 문화이론과 이를 적용해서 대중문화현상들을 분석하는 것이 주요 연구 분야다. 주요저서로『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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