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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하라,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라,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2.07.1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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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의 학문적 여정과 마현리 與猶堂

▲ 다산 묘소에서 바라다 본 여유당 전경.

다산 정약용의 생애는 크게 20년 안팍을 기준으로 세 등분해볼 수 있다. 22세 때 小科인 초시에 합격, 진사가 되고 이로부터 28세 때인 1789년 大科에 급제해 초계문신으로 벼슬길에 오른 이래 18년간을 나라와 그의 후견인이었던 정조를 위해 봉사를 한 게 첫 시기다. 39세 때 정조가 승하하면서 그의 천주교 이력과 활동이 문제가 되고 급기야 1801년 대규모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에 연루되면서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게 된 게 두번 째 시기. 그리고 유배생활이 해제된 1818년 고향인 馬峴마을로 돌아와 생을 마치기까지 17년 간의 만년생활이 마지막 시기다.

이런 인생 곡절에 함께하는 다산의 動線은 크게 나누어 그가 태어나 유년과 소년시절을 보낸 마재 마을, 그리고 벼슬에 있었던 서울과 유배생활을 했던 전라도 강진, 그리고 다시 돌아온 마재 마을로 그려진다. 다산이 태어나고 뼈를 묻은 마재 마을과 그의 당호이자 서재였던 ‘與猶堂’은 유배지 다산초당과 함께 다산이 형성한 정치·경세 철학과 학문적 업적의 산실이다. 특히 여유당은 그의 전저작을 모은 全書의 명칭이기도 하지만 다산이 마재 마을에 있을 때 거처한 공간으로, 말하자면 다산학의 보금자리나 마찬가지다. 마재는 다산이 태어날 당시는 경기도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에 속한 마을이었다.

다산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한강의 상류에 위치한 풍광이 아름다운 다산의 고향이다. 다산은 자신의 고향을 ‘소내’라고 쓰고 있다. 한강 상류이자 마재 앞을 흐르는 강을 苕川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다산은 고향마을을 아끼고 사랑했다. 소년시절 “… 어디 간들 이 좋은 언덕 얻을 거냐”며 시 「還苕川居」로 고향을 노래하고 있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다산의 생가는 그의 5대조 丁時潤이 터를 잡아 지은 곳이다. 다산은 15세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생활하기까지 어릴 적 시절을 마재 생가에서 보낸다.

그리고 그에게 유배의 어두운 그림자가 몰려오던 39세 때 고향마을로 와 저작에 잠시 몰두한다. 이 무렵 다산은 자신의 서재를 여유당이라 이름 지었다. 여유당의 여유는 『도덕경』의 “신중하라,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경계하라,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에서 따온 것으로,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다산은 58세 때인 1818년 18년 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여유당으로 환향해 고단하고 지친 몸을 의탁한다. 여유당에서 다산은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의 철학과 뜻을 담은 저작활동에 몰두한다. 10여년 벼슬살이에서 뜻을 세운 청년시절, 그리고 유배지 강진 ‘다산초당’에서 다져진 학문과 사상의 기틀을 이곳 ‘여유당’에서 다시 가다듬어 웅지를 곧추세운 것이다. 이곳 여유당에서 다산은 과거 ‘다산초당’에서 저술했지만 미완성 상태였던 『經世遺表』 44권을 마무리 한다. 그리고 유배 끝나기 전 쓴 『牧民心書』 48권의 서문을 쓴다. 이어 이듬해 刑獄 법정서인 『欽欽新書』 30권을 이곳 여유당에서 완성한다. 다산은 주지하다시피 ‘유배의 인생’을 살았다. 전라도 강진 땅에서의 무려 18년이란 억압의 세월이다. 그 기간과 복권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여유당에서의 17년이 다산 인생의 후반기이다.

이 기간 동안 다산이 이뤄낸 학문적 업적은 경이적인 것이다. 그는 생애동안 경집 232권과 문집 267권 등 모두 499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그 기간에 이뤄진 것이다. 다산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500여수에 달하는 시도 그 시절의 소산이다. 마재마을 ‘여유당’에서 다산이 보낸 만년의 시절은 어떠했을까. 전해지는 기록으로 다산은 학문과 저술에 몰두하면서도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틈틈이 여행도 즐기고 했다는데, 인근의 용문산도 오르고 소양강에서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유배에서 해제가 됐다하더라도 복권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한편으로 생활이 불편하고 어려웠을 것이다. 다산이 “(내 집) 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않는 것이 이미 상례가 됐다[過我門不入旣成例]”라고 적고 있는 데서 그런 점이 읽혀진다. 친구에게 보낸 서한에 이런 대목도 나온다.

▲ 여유당에 걸린 현판

 “流落된 7년 이래 문을 닫고 홀로 웅크리고 앉아 있노라니 머슴종과 밥 짓는 계집종조차도 함께 말도 걸어주지 않더이다. 낮 동안 보이는 거라고는 구름과 파란 하늘뿐이요, 밤새도록 들리는 거라고는 벌레의 울음이나 댓잎 스치는 소리뿐이라오…” 지난 11일 찾은 마재 마을의 여유당은 오락가락하는 장마 비에 조용히 젖고 있었다. 행정구역 상 마재 마을은 몇 차례 변천을 거쳤다. 다산 시절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였다. 그 게 해방이 된 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로 바뀌었고, 현재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속해 있다. 여유당의 본래 위치는 다산유적지 입구 주차장 부근이었으나, 1925년 대홍수로 소실됐던 것을 1986년 복원하면서 유적지 내에 세웠다.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된 전형적인 중부지방 班家의 소박한 모습이다. 여유당의 옛 자리를 알려주는 바위 표석은 지금의 여유당 왼쪽 한켠에 있었다.

지난 1974년 건립한 것으로, 당시 정일권 국회의장의 친필로 ‘與猶堂'이란 글씨가 새겨진 바위다. 건립기에 그 내용이 나오는데, 정일권 당시 국회의장이 다산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일권’이란 글씨가 다른 글씨에 비해 색깔이 달랐는데, 자세히 보니 누군가가 이름 글씨를 지워버리려 파낸 흔적이 있었다. 그 걸 다시 새기는 과정에서 색깔을 아예 흰색으로 칠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인데, 역사의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표석바위였다. 여유당 뒤 동산에 다산의 묘지가 있다. 다산이 생전에 ‘집 뒤의 子의 방향 언덕(屋後負子之原)’에 묻도록 했다던 그 지점의 묘소다. 그 곳에 다산은 풍산 홍 씨 부인과 합장돼 영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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