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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계몽을 생각한다
다시 계몽을 생각한다
  • 교수신문
  • 승인 2013.10.07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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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1783년 베를린의 한 개신교 목사가 <월간 베를린> 1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교회성사를 거치지 않은 세속 결혼식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이러한 폐습이 ‘계몽’이라는 이름 아래 이뤄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그는 사람들이 계몽의 정확한 의미도 모르면서 이 말을 유행처럼 쓰고 있다고 한탄한다. 도대체 계몽이란 무엇인가. 그 자신은 어디에서도 그 대답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칸트의 저 유명한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이 도발적인 질문에 대한 답장 형식으로 다음해 같은 잡지 12월호에 실린 글이다.
이 글에서 칸트는 ‘계몽’이라는 말에 관해 간결하게 정의를 내린다. “계몽이란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Unmundigkeit)’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 미성숙이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고 한 것은 이성 자체의 결핍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이성을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가 없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 스스로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운동의 표어다.


개인이 오랫동안 관행이 돼 버린 미성숙을 떨치고 나오는 것은 어렵다. 스스로 자신의 정신 수련을 통해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난 개인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계몽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는 칸트의 언명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그러나 대중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하다. 토론과 사상의 자유가 허용될 경우 미성숙에서 이미 벗어난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확신과 신념을 퍼뜨리고 대중 또한 쉽게 그 영향을 받아 스스로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계몽은 의지의 자유는 물론, 사회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필요로 한다. 칸트는 특히 문필가가 자신의 생각을 공적 공간에서 발표할 수 있는 자유를 생각했다. 결국 그는 누구나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거리낌 없이 표현할 자유를 갖는 것을 계몽운동의 첫걸음이라고 본 것이다.
칸트의 글은 18세기 후반 프로이센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200년 전 칸트의 슬로건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된다고 말하면 시대착오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즈음 정부와 집권여당이 쏟아내는 말과 행태를 접하다보면, 두 세기 전 칸트의 언명을 자주 머리에 떠올린다. 우리는 정말 계몽된 시대에 살고 있는가.


우선 오랫동안 잊었던 생경한 언어들이 주위에 넘쳐나고 있다. ‘一絲不亂’, 명령, 지시 같은 옛 조직의 생리를 나타내는 말들이 기승을 부린다. 한동안 잊었던 공작과 은폐의 행태도 도처에서 출몰한다. 책임장관제를 거듭 강조했으면서도, 청와대와 정부, 청와대와 집권여당 사이에는 토론과 소통 대신에 일방적인 명령만 관철된다.


행정부처의 장관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것처럼 보인다. 모두가 청와대만 바라보며 숨을 죽이고 있다. 이런 조직 원리에 수긍하지 않으면 배반자라는 말을 듣는 모양이다. 여기에 덧붙여, 이따금 전해지는 대통령의 발표에는 국가와 국민, 애국과 애족이라는 낱말만 다가온다. 모두가 좋은 단어들임에도 오히려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말들이 그 옛날의 국가지상주의와 파시즘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이 말들을 듣다보면, 대통령을 비롯해 현 집권층의 고위 인사들이 1980년대에서 갑자기 2013년의 시간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옮겨오지 않았나 하는 착각에 빠진다. 그 시대의 권위주의와 억압, 그것을 용인하는 집단 분위기에 익숙한 상태,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미성숙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의 언어와 행동에는 지난 한 세대에 걸쳐 한국사회가 이룩한 성취와 경험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한 세대의 시간이 사라졌다.


그들도 역시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살아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런 식의 언어만을 고집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 사회변동의 시간대에 스스로를 사회와 격리시키고 사회변화와 그에 대한 경험을 애써 외면해온 탓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이는 참으로 소름이 돋는 일이다.


지난 시간의 실종,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한 세대 전의 사회인식의 틀과 정서와 사고방식을 가지고 어떻게 오늘의 정치를 주도해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아니 앞으로 5년 후에 어떤 미래가 우리를 기다릴지 오히려 소름이 돋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한국사회는 계몽된 사회가 아니다. 계몽돼야 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니 말이다.

이영석 서평위원/광주대·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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