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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에 포커스를? … 그것은 어떤 수사학일까
눈물에 포커스를? … 그것은 어떤 수사학일까
  • 교수신문
  • 승인 2013.10.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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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얼마 전 9시 뉴스에서 진행자가 자신의 자리를 후배 앵커가 대신하게 됐다는 짧은 코멘트를 하면서 좀 특이한 한 마디를 덧붙여 눈길을 끌었다. 내용은 후배 앵커가 잘 할 것이다. “느낌 아니까”였다. 아홉시 뉴스의 비교적 건조하고 형식적인 스타일을 생각하면 이례적이다. 근래에는 물론 유머를 섞는 자연스러운 대화식 진행스타일을 도입하면서 과거의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공적인 성격이 짙은 9시 뉴스 앵커가 개그 콘서트를 인용하는 것은 흥미 있는 현상이었다. ‘대한민국 저녁 9시 공공방송의 뉴스’에 ‘느낌’이라는 말이 오버랩 되면서 왠지 격세지감이 든다. 그동안 공적인 자리에서는 감정은 잘 노출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면, 이제는 그런 관례를 깨는 파격이 조금씩 관례가 되고 있다.


그렇다고 뉴스들이 그 동안은 느낌에 무심했던 것은 또 아니다. 최근 국회 대정부 질문 방송에서 검찰의 항명논란을 보도하는 과정에 검찰수뇌부의 눈물이 잠시 카메라 영상을 탔다. 카메라는 그 눈물을 클로우즈업하면서 따라가고 있었다. 그 카메라가 이 ‘느낌 아나?'하고 묻는 것 같아서 다소 불편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이와같이 느낌은 일상의 경계를 소리없이 넘나들고, 공과 사의 영역에 공히 등장하면서 사실과 감정, 윤리와 정서 사이의 선을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다.


o 감정은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매개체다. 동시에 반감을 잠재우는 힘이기도 하다. 그런 차원에서 눈물에 머문 카메라 포커스에는 어떤 공감의 정치 혹은 설득의 수사학이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설득 당한다. 도덕적 선과 악, 인식적 참과 거짓에 대한 우리의 판단력은 감정 앞에 쉽게 굴복한다. 현실 사회의 관리와 통제는 그러한 방식으로 이미 오랫동안 감정에 호소해온 바 있다. 또한 자본주의 체계는 아주 섬세한 방식으로 감정을 환기시키면서 욕망을 부추겨왔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다.


현실의 관리체계와 소비체계가 포괄적으로 감정의 공간을 점유하는 와중에 좀 느리지만 책의 세계에서도 최근에는 그것이 서서히 화두로 떠오르는 양상이 감지된다. 『마음의 사회학』(2009), 『디오니소스의 그림자―광란의 사회학을 위하여』(2013), 『느낌의 공동체』(2013), 『음란과 혁명- 풍기문란의 계보와 정념의 정치학』(2013), 등 얼핏 제목만 보아도 어떤 변화된 흐름이 확연히 나타나는 것 같다.


물론 이런 경향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른바 문화연구를 중심으로 소위 감정적 전환 (affective turn)은 이미 그러한 시도를 수행해왔다. 또 문학과 문화연구는 정서적인 것에 대한 탐구를 기본으로 삼기 때문에 비교적 오랫동안 그러한 방향성을 견지해왔다. 하지만 정치경제학적인 공동체 이해의 틀을 정서적 차원에서 보완하고 확인시키는 자료로서의 ‘느낌’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들은 본격적인 전환으로 보기에는 부족하다. 심성을 주제화하면서 기존의 역사와 공동체에 대한 인식의 틀도 동시에 설득력 있게 탈구시킬 때 비로소 변화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증후적 독해만으로 앞서 언급한 책들이 이러한 작업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들은 ‘느낌’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부호를 다루면서, 감정과 정서를 개인의 심리적 차원의 것으로 치부하고 학적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폄하해온 기존의 편견들을 적절히 견제하고 있다. ‘마음의 레짐’(『마음의 사회학』)은 말하자면 정치경제적 체제와 다르면서도 사적이거나 심리적 표상에 그치지 않는 어떤 집합적 의식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사실로써 검토돼야 하는 것이다.

또한 정념의 정치학은 ‘정념과 통치의 선이 구획되는 역사적 맥락’(『음란과 혁명』) 을 추적한다. 이러한 천착은 기존의 시공간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공동체의 형성과 분절의 역학을 새로운 방식으로 고민하는 데 일조할 것으로 기대한다. 요즘 우리 사회는 깊이를 잴 수 없는 적대감, 이유를 알 수 없는 공감, 그리고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는 무감각으로 들끓는 감정의 도가니 같다. 윤리적 당위도 무색하고, 인식적 확실성도 요원한 때에 우리가 가야할 모색의 길을 눈물에 잠시 머문 카메라 포커스에서 배운다. 그공감의 정치는 “의미를 제로로 만들고도 포에지를 100으로 끌어올리는” 시인들의 ‘이상한 재능’(『느낌의 공동체』)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창남 서평위원/한양대·비교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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