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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자 우선’ 고집하는 사회
‘경력자 우선’ 고집하는 사회
  • 교수신문
  • 승인 2013.10.28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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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에 첫 직장을 잡았다. 몇 번의 면접 끝에 겨우 입사한 회사였다. 경력도 전무했고 신입치고는 나이가 많았다. 더군다나 많은 출판사가 경력자를 원했다. 처음 몇 번 면접을 볼 때는 좋은 분위기에 혹해 붙은 것 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기도 했다.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는 메일을 받는 날이 계속되자, 나는 어쩌면 직장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우울했고 화가 나던 어느 날, C 출판사 면접 때 만났던 분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안타깝다며 자신이 아는 다른 출판사를 소개 시켜줬다. 그렇게 알게 된 출판사 사장님도 나에게, 그저 준비를 하라고 했다. 출판 교육도 받고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을 지원하라고 알려줬다. 고향이 같다며 친근하고 구체적으로 알려줬다.
그분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기업에겐 노동자를 교육할 책임이 분명 존재한다. 경력자를 뽑는다는 것은 어디선가 분명히 신입을 뽑아 교육을 시키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련 교육 이수자를 뽑겠다는 건 네 돈을 주고 교육을 받고 오라는 소리이다.
“근데, 왜 굳이 그래야하지? 기업이 자선단체도 아니고.” “능력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기업은 이윤을 남기는 곳이고, 그러기 위해선 경력을 뽑아 바로 생산 현장에 내보내야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윤이라는 건 소비자가 있다는 전제 하에 생긴다. 소비자는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어야 소비를 한다. 하지만 기업은 소비자를 만들고 있지 않다. 매출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쳐내기 바쁘고 인력을 채용하는 것엔 야박하다. 그들은 단기적인 이윤을 남기기 위해 미래 가치를 버리고 있는 거다.
간단한 예로 나를 둘 수 있다. 나는 이 직장에 취업하기 전에는 돈을 잘 쓰지 않았다. 백수였으니까 쓸 돈이 없었다. 부모님에 틈틈이 용돈을 받고 있었기에 부모님은 나에게 용돈을 준만큼 소비 생활을 하지 못했다. 마냥 악순환이었다. 하지만 취직을 한 이후에는 쓸 돈은 쓴다. 적당히 옷을 사고 휴대전화 요금도 밀리지 않는다. 학자금 대출 이자도 꼬박꼬박 낸다. 책도 사고 노트북도 산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먹고 사는 기업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내 주변에는 경력을 쌓는다는 이유로 백만 원이 조금 넘는 월급을 받으며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은 돈이 궁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돕기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일을 가릴 처지가 못 되고 당장 먹고 살려고 어떤 일이든 해야 하는 사람들. 어리고 약하고 눈물 많은 사람들.


“일하면서 경력 쌓고 더 좋은 곳에 가.” “가르쳐 주는 걸 고맙게 생각해. 딴 데서는 배우지도 못해.” “가족 같은 분위기 망치지 말고 눈치보고 잘 따라 해.” “돈이 들어와야 월급을 주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기어코 살아가는 사람들. 하지만 대부분이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직장을 그만둔다. 그 순간, 그들은 사회생활을 못하고, 참지 못하고, 꿈도 없는 사람이 돼버리고 만다. 그 누구도 이들에 대해 평가할 수 없는 것인데 사회는 그냥 그렇게 재단한다. 먹고 살 일이 막막했을 뿐인데 노동력을 착취한 기업은 그래도 신입을 쓰려고 노력하는 회사가 되고 거기서 일하다가 도망친 사람은 무능력자가 되고 만다. 참 나쁜 사람들이 배를 불리고 살고 있다. 어리고 약한 사람들을 이용하려고만 하는 자들이다.
동생이 생각난다. 여동생은 나보다 두 살이 어리다. 동생은 상고를 나왔고, 3학년이 되던 해 S기업 생산라인에 취직했다. 그때 우리 가족은 다들 떨어져 살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친구 댁에, 나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동생은 밤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울었다고 한다. 힘들다고. 하지만 동생은 그만둘 수 없었다. 스러져가는 가족을 둔 덕분에 동생은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돈을 벌었다.
동생은 언제가 대학에 다니고 싶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내가 벚꽃 핀 캠퍼스를 거닐 때, 동생은 공장에서 일했다. 나는 동생보고 놀러오라는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생과 대화를 나눌 때 어색했다. 한번쯤 동생과 함께 벚꽃 핀 캠퍼스를 거닐 법도 한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내 갈 길만 갔다. 나는 그게 아직까지 동생에게 미안하다. 동생이 대기업 생산라인에서 힘들게 일을 할 때, 내가 했던 것이라고는 고작 수업을 빼먹고 놀러 다니는 일이었다. 어린 여동생이 착취를 당하고 있었는데 나는 노동자 세상 운운하면서 살았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여동생. 조카들 얼굴에서 여동생의 어렸을 때의 표정을 본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분명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장난기 가득한 그 표정을 오래 간직할 수 있게끔 나도 노력을 하려고 할 것이다. 이토록 미안한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이제 나는 묻고 싶다. 그 힘든 시간을 참고 견딘 여동생이 그만큼의 대가를 얻었는지에 대해. 동생이 생활 전선에 뛰어들고 얻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세상은 동생에게 빚진 게 없었을까. 동생은 지금보다 더 잘 살고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일을 시작한지 2년이다. 월급을 받으며 살기 시작한지 2년. 매일매일 힘들다고 생각한다. 매일매일 왜 이러고 살아야하는지 생각한다. 이건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꿈과는 분명 다른 문제다. 나는 참고 살면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다. 싸울 거고 분쟁을 일으킬 거다. 동생이 힘들 때 함께하지 못했기에, 침묵을 선택했기에. 결론은 이거다. 아무리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고, 좋은 상품을 만드는 곳이라 할지라도 노동자를 ‘이용’하거나 경력자나 능력 있는 사람만 채용하는 회사는 결코 좋은 회사가 아니다. 기회조차 주지 않는 기업은 제 배를 불리기에 바쁘다. 그리고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망하게 될 것이다. 이건 저주다.

□ 다음호 추천 릴레이 에세이의 필자는 김풍기 강원대 교수입니다.


백상웅 시인
2008년 창비신인상 시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거인을 보았다』를 상재했다. 출판일을 하면서 시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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