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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다에 역사가 솟구쳐 올랐다
그 바다에 역사가 솟구쳐 올랐다
  • 차윤정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3.10.2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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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32_ 마산

 

▲ 차윤정 HK교수가 마산을 역사의 공간으로 만든 1960년 4월 11일의 장소를 찾아 카메라에 담았다. 그의 말대로 ‘그 바다에서 역사가 솟구쳐 올랐다.’사진 속 김주열 열사를 기린 기념판이 보인다. 왼쪽 사진 안은 당시 사건을 보도한 기사다.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1960년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 한 구가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3·15 의거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 마산상고 입학예정자 김주열이 실종 27일 만에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참혹한 어린 주검은 시민들을 분노로 들끓게 했고, 마산 2차 의거를 촉발했다. 시민에게 발포한 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는 격화되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타오르는 민주의 열망은 북으로 북으로 올라가 4월 19일, 경무대 앞을 숱한 민주열사들의 피로 물들였고,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다. 영원히 수장돼 버릴 것 같던 음험한 비밀도, 민주의 열망을 외면할 수 없었던지 어린 죽음을 역사의 푯대로 세웠다. 이렇게 마산 앞바다는 4·19의 출발점이자 민주민권의 첫 승리의 역사를 기록하는 장소가 됐다.

민주·민권의 첫 승리의 역사
공통의 역사적 경험과 기억은 집단의식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고 했던가. 3·15에서 4·11, 4·19로 이어지는 역사적 경험과 기억의 공유는 자연스럽게 3·15를 마산의 정신, 상징으로 자리매김 시켰다. 이후 마산의 정신인 3·15는 기념이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호출되면서 시대적 맥락에 따라 달리 전유돼 왔다. 초기 3·15 기념사업은 순수하게 시민과 학생들의 힘으로 계획돼 민주라는 3·15 정신의 진정성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1961년 3·15 기념행사를 마산시장이 주도하게 되고 3·15 의거탑을 세울 장소를 놓고 추산공원을 주장하는 시민들과 현재의 위치를 주장하는 시가 대립하게 되면서부터, 3·15의 주체인 시민들은 기념의 주체 자리에서 밀려났다. 이후 마산시는 5·16 군사정부로부터 1억 환의 보조금을 받아 기념탑과 기념회관 건립을 추진한다. 쿠데타의 명분을 민주당의 부패에서 찾았던 5·16 군사정부는, 국민적 명분을 얻은 3·15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한 항거라는 점에서 두 사건을 일치시키려 했고 이를 통해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불의와 부정에 대한 저항’으로 의미화 되었던 3·15는,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근대화 담론 속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전유된다. 마산 역시 근대도시화를 3·15 정신과 결합시키고, 마산수출자유지역을 내세워 수출전진기지라는 마산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나갔다.


1979년 10월, 3·15 정신은 ‘부마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활한다. 유신정부의 인권탄압과 철권정치에 반대하여 부산·마산 시민들이 대대적인 가두시위를 벌이게 되고, 두 지역에 계엄령과 위수령이 발동된다. 당시 마산에서 부마항쟁에 참가했던 시민들은 항쟁의 당위성과 왜 마산이 일어나야 하는가를 3·15에서 찾았다. 부마항쟁 당시 3·15 의거탑이 저항의 상징공간이자 중심공간이 된 지점도 여기에 있다. 이 시점에서 3·15 의거탑을 만든 주체나 5·16 군사 쿠데타와의 관련성은 의미가 없었다.

다만 부마항쟁의 주체들에게 이 탑은 민주정신이라는 3·15의 의미를 일깨우는 상징이었을 뿐이다. 부마항쟁의 슬로건은 유신독재의 타도였고 3·15는 이승만 정권의 장기 집권과 독재 권력을 시민의 힘으로 무장 해제시킨 역사였기 때문이다. 부산·마산에서의 시위가 격화되던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유신체제는 종식된다. 정통성의 확보를 위해 3·15 정신를 호출했던 정권은 다시 3·15 정신을 통해 그 종말을 고한 것이다


제작 주체와 상관없이 3·15 의거탑이 민주정신의 상징으로 자리잡아 가는 동안, 민주 역사의 기록지인 마산 앞바다는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게 됐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건설 자재와 시멘트 모래 골재를 쌓아 놓은 야적장, 선박회사의 탱크, 택배회사의 물류창고가 각 시대를 대표하는 마산 앞바다의 얼굴로 자리하면서, 민주화의 성지라는 표상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나 보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 바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역사의 아이러니는 마산 앞바다의 또 다른 이름을 ‘가고파’로 쓰고 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라는 서정을 통해 애향과 노스탤지어를 환기하는 ‘가고파’는, 인간의 귀소본능을 자극하며 민주화의 성지가 아닌 새로운 마산을 상상하게 한다.
‘거친 항쟁’에 반해 ‘따뜻한 서정’으로 미화된 이미지, 그 아래 가려진 ‘야합’의 진실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애써 눈 감으려 해서일까. 3·15와 4·19를 ‘무모한 흥분’,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 ‘불합리·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라고 부정했던 가고파의 시인 이은상, 평생 양지만을 탐했던 그의 한결같은 권력 지향은 또 다시 햇살을 받고 있다. 옛 마산 지역 내에서도 첨예한 갈등이 있지만, 마산역 앞 이은상 시비 건립 등을 시작으로 ‘가고파’는 그 이름을 지켜갈 것 같기 때문이다.

바람부는 ‘가고파’의 바다 너머에는…
마산이 창원으로 통합된 이후, 창원시와 마산지방해양항만청은 2017년까지 마산만 일대를 시민들의 품으로 돌려준다는 목표 아래 워터프런트 사업을 추진 중이다. 사업 구간 내 서항지구 일대를 ‘역사를 품에 안고 시민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가고파의 바다, 마산서항’이라는 비전 아래 개발하는데, 그 안에 민주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추모광장(김주열 열사 및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수평적 기록공간)과 민주광장이 자리하게 된다고 한다. ‘가고파’가 품은 민주, 이제 3·15와 부마항쟁은 뼈도 살도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이 새삼스럽지 않은 것은 마산이라는 지명과 함께 민주정신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일까. 4월을 읊은 어느 시인이 보이지 않는 것은 죽음만이 아니라고 했던가.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룬 것은 없고/ 죽은 자가 또다시 무엇을 이루겠느냐”라는 시인의 탄식만이 아련하다.


2011년 시민단체의 요구에 따라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일대가 경상남도 지정 문화재로 지정됐다. 또 최근에는 늦게나마 창원시가 이곳에 ‘한국민주주의전당’을 유치하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고 한다. 이곳이 우리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혁명이 시작된 곳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차윤정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
부산대에서 박사학위를 한 필자는 지역어, 로컬리티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언어권리와 로컬의 주체형성」, 「언어표상을 통한 로컬리티 구성」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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