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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 명칭에서 한민족의 시원사상을 발견할 수 없다면?
유물 명칭에서 한민족의 시원사상을 발견할 수 없다면?
  •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서예가
  • 승인 2013.11.3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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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 15. 환두대도 三枝葉

 

▲ 합천 옥전 M3호분 용봉문환두대도
“문양은 단순한 무늬가 아니라 어떤 대상에, 어떤 목적으로, 어느 위치에 배치하고, 어떤 양식으로 구성하느냐를 분명하게 의도한다. 그럼으로 문양은 일정한 질서에 의해 그 나라나 민족의 독특한 미술양식을 지니게 된다. 이렇듯 문양은 인간만이 지닌 의미 있는 상징적인 사고의 표현물인 것이다.”(『한국고고학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지금까지 연재를 계속하면서 누누이 강조했지만, 고대유물의 문양은 유물의 정보를 압축한 상징적 표현물이다. 그러므로 문양의 상징에 대한 해석은 그 문양을 여하히 해독하느냐에 따라서 방향이 완전히 엇갈린다. 특히 한국고대문화의 시원적 문양에 대한 해석은 민족문화의 형성과 배경의 뿌리를 말하는 것이 되므로 그 사상적 기저와 정체성을 짚어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이번 호는 삼국시대 환두대도의 고리내의 문양에 대한 시원과 상징적 原意를 밝혀 기존학계의 오류를 비판하는 동시에 그 문양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삼국시대 고분 속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 피장자의 신분과 지위를 알 수 있는 유물은 금관과 금제허리띠 그리고 環頭大刀가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다. 환두대도(고리자루칼)에 대한 설명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고리자루칼은 둥근 고리형태의 손잡이 머리를 가진 칼이다. 주로 무덤의 껴묻거리로 출토되는 고리자루칼은 한반도의 경우 B.C 1세기대부터 출토되며, 창원다호리 1호분의 민고리자루손칼(素環頭刀子)이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이다. 중국의 경우 전한대부터 후한대에 이르기까지 동검이 동칼(銅刀)로 바뀌게 되고 이것이 다시 쇠칼(鐵刀)로 변하게 되면서 나타난다. 전체 길이가 60cm 이상인 것을 큰칼(大刀), 30cm 이상 60cm 미만인 것을 작은칼(小刀), 30cm 미만인 것을 손칼(刀子)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한국고고학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환두대도는 삼국시대 지배층의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며 금은장식을 띠고 있다. 특히 백제, 가야, 신라의 5~6세기대 분묘출토품이 전형이다. 환두에 장식되는 도안에 따라 龍鳳文大刀, 三累大刀(세고리자루큰칼), 三葉大刀(세잎고리자루큰칼), 小環頭大刀로 구분된다. 이중 소환두대도는 다시 銀裝大刀와 상감대도로 세분된다. 삼엽대도는 중국 한대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유행하는 대도로 각국 대도의 基通型이다. 그 중 신라에서는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진 上圓下方形의 고리 내에 삼엽문을 베푼 특징적인 대도가 제작되었다. 삼루대도는 중국에 유례가 있으나 신라에서 크게 유행한 中心大刀이고, 용봉문대도는 삼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왜에서도 많이 제작되었는데 모든 대도 가운데 최상급 대도였다. 대가야에서 출토되는 은장대도와 상감대도의 기원은 백제에서 찾을 수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신라에서 사용된 큰칼의 종류로는 민고리자루큰칼(素環頭大刀), 세잎고리자루큰칼(三葉環頭大刀), 세고리자루큰칼(三累環頭大刀)이 있는데, 신분에 따라 소유할 수 있는 종류가 제한되어 있었다. (「위대한 문화유산」,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황남대총 남분 출토 세고리자루큰칼 조)
[그림1]에서 볼 수 있듯이 환두대도의 문양은 무늬가 없는 素文 환두에서 三葉文 환두로 변화한 뒤, 다시 三累文과 병행하는 시기를 거쳐 龍鳳文 환두로 진화한다. 여기서 필자는 素文은 태양문일 가능성이 있다고 해석하여 소문이란 이름보다 고구려의 환문총(길림성 집안시 하해방촌 묘구 33호분, 둘레 80m, 높이3.4m의 돌방흙무덤, 20여 개의 環이 그려져 있음)처럼 環文으로 명칭을 고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환두대도의 계보는 최초로 중국 廣西 장족 자치구 明縣 明江에 臨한 江岸의 岩崖에 위치한 花山岩畵에서 허리에 環刀를 찬 舞蹈人이 보인다[그림 2 왼쪽]. 花山岩畵는 戰國시대부터 東漢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려진 바위그림으로 붉은 주사를 사용해 일천 삼백여 명의 나체군상이 펼치는 祭神, 巫術, 舞蹈의 세계적 유명 희귀 암화다. 環刀의 실제 유물은 東漢시대 鷹文環頭玉刀가 최초이며[그림2의 오른쪽], 뒤를 이어 삼진시대부터 鐵製素文환두대도가 나타난다.

즉물적 견해와 誤讀이 반복되는 이유
우리나라의 환두대도의 선구는 고구려이고, 삼한시대와 신라, 백제, 가야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 뒤 독자적인 기술이 발달해 환두대도는 그 당시 지배자급 고분에선 거의 빠짐없이 출토되는 병권의 상징인 武器로, 또는 신분표시의 儀器로 등장한다. 때문에 거기 표현된 문양의 상징성은 고대문화의 사상과 아이덴티티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 환두대도 고리안의 대표적 문양은 이른바 ‘三葉紋’이다. 삼엽문에 대한 기존견해는 세가닥 잎사귀무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즉물적 견해이며 誤讀이다. 삼엽문은 고대부터 태양과 등가물로서 우두머리를 상징해온‘솔개’의 모습이 그 원형이다. 삼엽문에 대한 기존 견해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철제 세잎고리자루칼이 출토된 유적으로 신라,가야지역에서 동래 복천동 고분군이 있으며, 고구려지역에서는 평양 병기창지, 桓仁 高力墓子 15호분 등이 있다. 일본의 경우 나라(奈良) 동대산사 1호분, 福島縣 會津大塚山 古墳, 福岡市 若八幡宮 古墳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이 철제세잎고리자루칼은 매우 제한된 소유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정치와 군사적인 힘을 나타내는 상징적 위세품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원류는 고구려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고고학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세잎고리자루칼은 고리 안에 세 잎 형태의 도상이 있는 것을 말하며, 이 세 잎의 형태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 세 잎의 기원은 인동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한국고고학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세 고리자루큰칼(三環頭大刀)은 중국의 경우 칼의 실물은 없으나 벽화나 화상석의 무인상 등에서 일부 보이기도 한다. 신라지역에 집중적으로 출토되며, 황남대총남분의 母子 세 고리자루큰칼이 대표적이다.”(『한국고고학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三葉文에 대한 기존학계의 해석은 대체로 모양이 세 개의 잎사귀처럼 보이기 때문에 삼엽문, 또는 三枝葉文이라 하고, 그 기원은 인동당초문이 간략화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삼엽문이란 것은 일본고고학계에서 통용된 명칭을 우리가 그대로 습용한 명칭이다. 인동문이 그 기원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연구자들에 의해 최근에 와서야 제기된 주장이다.


여기서 분명히 따지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이른바 삼엽문, 또는 삼지엽이란 명칭의 타당성 검토다. 한국 고대문양의 시원인 빗살무늬[櫛紋]가 과연 타당한 이름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즉물적인 삼엽문이란 명칭이 주는 이미지는 결코 한국 고대문화의 시원적 성격이 못 된다. 그런 명칭 속에는 한국문화의 어떤 시원사상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일본고고학계의 이론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는 현실은 많은 안타까움을 준다. 이젠 우리도 우리문화의 정체성에 알맞은 한국식 고유한 이름을 지어야 한다.


前回의 금제허리띠에서도 논한 바 있지만, 이른바 삼엽문 또는 삼지엽의 원의는 세 잎 형태의 도상이 아니다. 고대의 태양숭배사상에서 연원된 새숭배사상의 도상이 그 기원이다. 따라서 삼엽문은 神鳥의 성격을 지닌 솔개의 도상이 그 원형임을 추단한다. 솔개가 신조의 성격을 지닌 새라는 것은 ‘솔개’의 어원이 神의 고유어인 ‘살’이 모음교체된 ‘솔’에 접미사 ‘게’가 결합된 ‘솔(살=神)+개’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솔개는 새의 왕자로서 군왕의 심볼이었다. 이것은 동서문화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三累文은 세 개의 鏤空이 겹쳐 있는 문양이란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짐작되지만, 그 이름도 삼엽문과 마찬가지로 문양의 정보를 전혀 읽어내지 못한 어처구니없는 이름에 불과하다. 이른바 삼루문이란 문양은 날개를 활짝 편 솔개의 머리와 꼬리까지 전체 조형을 완전히 오려낸 陰刻式 조형물이다. 솔개의 문양을 남긴 陽刻式 조형이 삼엽문이고, 그 대를 이루는 陰刻式 조형이 三累文인 것이다. [그림4]의 (1)은 황남대총북분 출토 금동허리띠의 드리개다. 상단의 삼엽문과 하단의 鏤空은 다른 도상 같지만 사실은 모두 솔개의 도상이다. 위의 삼엽문은 솔개의 양각 도상이고, 아래 과판의 도상은 솔개의 음각 도상이다.

그것은 대칭적 음양조화의 디자인적 기법이다. (1), (2), (3)의 三累文 역시 솔개의 도상을 鏤空法으로 음각한 것이다. (2)와 (3)은 도상의 형태가 진화했다. 금관총 출토 三累文(2)은 內空을 다이아몬드식으로 변형했고, 나주 복암리 출토 三累文(3)은 날개를 활짝 편 솔개가 턱 앉아 있는 조형이다. 때문에 이들 문양의 명칭은 三累文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자면 三鏤文이어야 옳다. 三累는 세 개의 문양이 쌓였다는 뜻이고, 三鏤는 세 개의 문양을 새겨냈다는 개념이기 때문에 삼루문의 한글표기는 같아도 한자표기는 완전히 다른 의미다.

三葉文은 ‘솔개’의 陽刻, 三累文은 陰刻造型
다시 말해 三葉文과 三累文의 기본적 상징은 무엇인가? 세 가닥 잎사귀인가? ‘솔개’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한국 고대문화의 시원적 방향을 가른다. 눈에 보이는 대로 명명한 삼엽이란 틀에 갇혀 그 原意를 해독하지 못하고 ‘인동문의 간략화’란 이치에 맞지 않은 주장을 펴는 것은 고대문화의 시원적 원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임시방편적 주장에 불과할 뿐이다. ‘인동문의 간략화’라면 왜 그런가? 라는 질문에 명쾌한 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


환두대도의 삼엽문과 삼루문은 용봉문으로 진화하면서 金裝, 銀裝으로 화려해진다. 그 이유는 국력의 성장과 군왕의 위세가 강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합천 玉田 M3호분 출토 용봉문환두대도와 백제 무령왕릉 용봉문환두대도, 나주 신촌리 출토 은장봉황문환두대도, 동경국립박물관소장 소창콜렉션 금은장봉황문환두대도가 그 좋은 예이다.
솔개와 매의 문양이 상상적인 용봉의 문양으로 변화한 이미지적 발상은 공작의 실물이 배경일 수 있다. 모든 문양의 모체는 자연현상이 그 중심이 되고, 거기에 인간의 상상적 지혜가 만들어내는 미적 작용이 문양이다.


솔개와 매는 맹금류에 속하는 새의 王子 격이다. 솔개와 매는 과가 다른데 대체로 큰 맹금류는 솔개이고, 작은 맹금류는 매다. 몽골의 솔개는 여우와 늑대까지 사냥한다. 神鳥 솔개의 본말은 소리개인데 준말인 ‘솔개’를 더 널리 쓰므로 ‘솔개’만 표준어로 삼는다. 古語는 ‘쇼로기’, ‘쇠로기’(『분류두공부시언해』 초간본, 1481)인데, 新羅의 古國名과 관계있는 이름이다. 신라의 조익형 관식의 높이가 45.0cm(천마총)와 40.6cm(황남대총남분)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일본어로 신라를 ‘시라기’라 부르는 것도 솔개와 무관치 않은 말임에 틀림없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冠飾과 환두대도, 방패 등 무기류의 문양에 솔개문을 공유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삼국의 문화적 DNA는 같다. 따라서 솔개나 매가 고대한민족의 族徽(민족의 휘장 마크)의 성격을 지닌 대상이다. 절대로 ‘호돌이’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동물이 될 수는 없다.


매는 솔개보다 작지만 빠르고 날카롭다. 신라 조익형 관식 중에서 천마총 출토의 이른바 蝶形 금제관식(高 23.0cm,보물617호)과 경산 임당동 출토 금동관식(高28.7cm)과 은제관식(高14.3cm) 등은 크기가 작은 것으로 봐서 매의 도상이라고 해석한다.


매는 우리 의식 속에 도덕과 정신적 훈육을 할 자격을 지닌 尊丈의 개념도 있다. 즉 ‘매’를 들 만한 어른이라는 상징적 어휘로 전의됐다. 70세가 된 나라의 공신에게 임금은 机杖을 하사하는데, 궤는 책상이고, 장은 鳩杖이다. 그 구장의 끝에 장식된 비들기는 애초엔 매였다. [그림6]의 (6) 漢代 청동 구장도 모양이 매에 가깝다. (5)의 능산리에서 출토된 백제 木鷹도 하단의 깎음새가 어딘가에 붙여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다. 아마 구장의 끄트머리 부분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이와 같이 매는 우리에겐 의식상 참으로 중요한 새다. 매를 든 사람은 다스리는 사람이다. ‘매섭다’, ‘매질’이란 말이 모두 그것과 연관된 말이다. 구장의 원형이 ‘매’인 것이다. 신라 진평왕은 매를 가지고 사냥했다는 기록이 있고(『삼국사기』 열전 金后稷條), 『日本書紀』에도 仁德王 때 백제 사람들을 통해 매사냥을 배우고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때는 송골매인 海東靑을 원나라에 貢物했고 鷹坊을 설치할 정도로 매사냥이 성행됐다. 이처럼 ‘솔개’와 ‘매’의 조형은 고대부터 紋章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 됐다. 신라 때는 조익형 관식으로, 가야엔 투구와 견갑의 문양으로 장식됐다. 오늘날엔 이런 원리를 모르고 장군의 투구 위 장식을 ‘삼지창’이라고 말하는 웃지 못할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른바 삼지창은 우두머리를 상징하는 솔개나 매의 상징적 조형이 변형된 오래된 문장이다. 세 갈래 창과 같은 무기의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국문화의 콘텐츠를 개발하려는 젊은 연구자들은 문화의 상징왜곡에 대한 바른 해석을 시도하는 본 연재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우리문화 원형에 대한 상징해석을 아무리 새롭게 전개했다 하더라도 기존학계로부터는 외면 받기 마련이다. 젊은 연구자들이 새로운 발상과 신선한 수혈로 기존해석의 틀을 깨고 고대문화 정보의 핵심을 꿰뚫어야 한다. 본연재의 진정한 의도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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