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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자연 속에서 인간의 길 찾아 떠돈 세월 350년 ‘흥덕패철’의 전통을 재해석하다
우주와 자연 속에서 인간의 길 찾아 떠돈 세월 350년 ‘흥덕패철’의 전통을 재해석하다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3.12.09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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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_ 18. 輪圖 - 김종대 輪圖匠(중요무형문화재 제110호)

윤도로만 살림살이 하기는 참 팍팍했습니다. 그래도 이 길을 걸어오길 참 잘했구나 싶어요. 윤도는 바르게 가는 것이고, 어디에 갖다 놔도 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한 평생 부자는 아니었지만 바르게 살려고 노력해 왔지요. 윤도가 내 삶의 나침반으로 말없이 가르쳐 준 교훈입니다.

輪圖. 옛날 무덤자리나 집터를 정할 때 풍수가나 지관이 사용하던 나침반이다. 바퀴 모양의 윤도는 가운데 나침반을 중심으로 하늘의 별자리, 방위, 천간과 지지 등을 새겨 넣은, 시쳇말로 내비게이션으로 축약해 부를 수 있는 우리의 오래 된 문화유산이다. 물론 위성을 통해 위치와 방향을 알려주는 지금의 내비게이션보다는 훨씬 심오한 내용이 내포된 도구다. 단지 방위나 위치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원리와 함께 산수의 흐름까지 측정할 수 있으며 易의 이치와 천문학, 점술, 지리학이 그 속에 담겨 있다.


더 구체적으로 윤도는 작은 원반형의 대추나무 표면에 24방위를 나누고, 각 칸에 음양, 오행, 팔괘, 십간, 십이지를 주역의 원리에 따라 새겨넣은 다음 그 한 가운데 항시 남쪽을 가리키는 磁針을 올려놓은 형태의 나침반이다. 구조적으로 윤도는 한복판에 나침반이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커지는 여러 층의 원이 그려져 있으며, 이 원들과 바퀴살 모양의 직선들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방위를 표시하는 주역과 팔괘 등의 여러 한자들이 깨알처럼 빼곡히 쓰여 있다. 이 글자들은 동서남북 등 방향 표시의 글자가 아니라는 점이 일반 나침반과 다르다.

나침반, 지남철, 지남반, 羅經, 그리고 허리에 차고 다닌다 해서 佩鐵이라고도 한다. 윤도를 갖고 지관들은 집터나 묫자리를 골랐고, 천문학자들은 시간과 별자리를 관측했으며 旅人들은 방향을 가늠했다. 윤도는 그 시원이 중국 한나라 대까지 소급된다. 그 당시 이미 풍수점에 쓰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경우 윤도라는 말이 문헌에 보인 것은 조선조 영조 때다. 『영조실록』 1718년 11월 초에 “청나라에서 들어온 오층 윤도를 모조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러나 윤도가 풍수 행위의 도구로 쓰인 것은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지금도 무덤이나 집터를 잡을 때 흔치 않게 쓰이고 있으니 우리 민족과 윤도와의 연관은 생활적인 측면에서 그 뿌리가 깊은 것이다.

백부로부터 전수받은 윤도 제작술 … 직장 그만두고 외길로
김종대(81) 옹은 전통 윤도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재(제110호)로, 윤도 제작과 해석에서 국내 유일의 지위를 인정받은 輪圖匠이다. 김 옹은 전북 고창의 낙산마을에서 윤도를 만들며, 이것을 가업으로 4대째 이어오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낙산은 풍수사상이 등장했던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윤도를 제작해온 것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조선시대 이곳에서 제작된 윤도는 당시 지명을 따 ‘흥덕패철’이라고 불렸는데, 방향이 정확하고 견고해 유명해지면서 전통 윤도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흥덕패철’로 이름이 높은 낙산마을의 자부심은 350년 된 이 마을의 윤도 역사와도 관계가 깊다. 全씨 성을 지닌 사람이 이 마을로 처음 들어와 윤도를 만들었다고 하니, 마을이 생길 때부터 윤도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전씨는 나중에 같은 마을에 사는 韓씨에게 윤도 제작기술을 물려줬고, 한씨는 또 徐씨에게, 그리고 서씨는 다시 ‘한운장’이라 불리는 한씨에게 물려줬다가 마침내 김 옹의 할아버지인 김권삼에게 전수됐다. 이와 같이 낙산마을은 혈연과 관계없이 윤도를 잘 아는 재주 있는 이에게 윤도 제작기술과 도구, 나침반의 자침을 만들 수 있는 자석 원석을 물려줘 온 특징이 있다. 그만큼 윤도를 사랑하고 아끼며 자랑하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1996년 김 옹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을 때 온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벌여 축하해줬다.


김 옹은 윤도 제작기술을 둘째 백부인 김정의로부터 이어받는다. 백부는 윤도 일을 하는 형님의 아들이 있었지만, 김종대에게서 그 가능성을 더 크게 본 모양이다. 차분한 성격과 인내심, 그리고 뛰어난 조각솜씨가 백부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그래서 김 옹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이다. 그게 1962년이고 김 옹은 당시 다니던 직장을 버리고 윤도에 전념한다. 50년도 더 된 세월이다. 사실 김 옹에게는 당시 갈등도 없잖아 있었다.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처지에서 윤도 일에만 전념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백부가 타계하면서 그에게 남긴 유언이 비수가 된다.
“백부가 돌아가시면서 제게 유언으로 ‘비록 돈이 되지 않더라도 가업의 맥을 끊지 말고 꼭 이어서 하라’고 하셨지요. 그 유언이 숙제처럼 됐지만 윤도에만 매달려서는 당장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은 직장생활을 더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부의 유언을 잊지 않았다. 농협에 다니는 동안 젖소를 길러 4남1녀를 교육시키고 살림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마침내 직장을 그만두고 윤도에만 전념했다.
윤도에만 전념키로 했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그가 배운 것은 백부가 하는 일을 어깨너머로 배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아 공부를 시작한다. 직장 다니면서 한 윤도 수리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한문 독해를 위한 한문공부도 독학으로 했다. 집안 대대로 물려져온 『관상감 윤도 판본』(현종 14년, 1848년 관상감에서 만든 24층 윤도 판본)을 뚫어져라 파고들어 연구하면서 독하게 독공을 쌓아 그는 스스로 윤도 전수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윤도에는 지남철 바늘이 담긴 한가운데 태극을 비롯해 8괘, 간지와 육갑, 음양과 오행, 24방위, 별자리 28수, 24절기까지 모두 담겨져 있어 그 뜻을 다 헤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김 옹도 배우는 과정에서 윤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한때 서당에도 다녔지만, 윤도 전체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침반이나 현대인이 사용하는 내비게이션이 단지 위치나 방위만 표시하는데 반해 윤도는 하늘의 별과 땅의 시간까지 모두 담고 있으니 이를 이해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풍수를 살피는 지관이 참고하는 ‘穿山’이니 ‘透地’ 등의 윤도 내용은 산의 흐름인 용맥과 땅의 기운을 측정하는 것이고, 풍수의 대미라고 할 수 있는 ‘分金’(관을 묻을 때 위치를 정확히 하는 것) 역시 방위가 아니라 윤도로 기맥을 정확히 측정해내는 일이니, 윤도가 나타내는 세계는 저 우주공간부터 땅속까지, 그리고 카오스 상태의 무극의 시간부터 정확한 절기까지, 시공간을 총망라한다고 하겠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윤도를 ‘羅經’이라고 했는데, 삼라만상을 다 포함하며, 천지를 날줄과 씨줄로 조직해냈다는 뜻이다. 이처럼 윤도는 단순히 길을 찾는 도구가 아니라 우주와 산천을 이해하고, 그 사이에 사는 인간이 자연에 맞춰 조화를 도모하는 지혜를 담고 있다. 그 지혜는 易과 천문학, 점성술, 지리학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조선시대에는 관청인 ‘관상감’에서 윤도를 만들었다.


이렇기 때문에 윤도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정확성과 견고성이 우선 생명이니 윤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 재질이 되는 나무를 고르는 일부터 자침을 만드는 일에 이르기까지 만만한 일이 하나도 없어 신경줄을 팽팽히 조여야 한다고 김 옹은 말한다. 무엇보다 나무가 중요하다. 김 옹은 윤도를 만들 때 200년 이상 된 대추나무를 1년 이상 그늘에서 말린 뒤 사용한다. 결이 고르면서도 단단해야 글자를 새길 때 갈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글자를 새겨넣을 수 있도록 동심원 하나를 360개로 구획하는 작업은 윤도의 생명인 정확성과 연관돼 있어 고도의 정교성이 요구된다.


원반형의 대추나무 가장자리를 깎아 판의 형태로 만들어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후 컴퍼스처럼 생긴 ‘걸음새’라는 전통 도구로 동심원을, 그리고 칸을 일정하게 나누는 定間작업을 한다. 정간이 중요하다. 김 옹은 “윤도는 정간이 생명입니다. 정간이 무언가 하면 동심원 하나를 1도 각을 이루도록 360개로 분금하는 것인데,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윤도 기능을 못합니다. 그러니 윤도의 생명이지요”라고 말한다.
동심원 1개를 1층이라 하는데, 이를테면 아홉 개의 동심원 칸이 있으면 9층 윤도가 된다. 층수가 많을수록 십간, 십이지, 24절기까지 확장되고 세분화된다. 지관들은 통상 5층짜리나 9층짜리를 쓴다.


정간이 끝나면 글자를 새겨넣는 刻字를 해야 한다. 한 자, 한 자 글자를 새기는데,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일이다. 각자 작업에서는 한 획이라도 잘못되면 그 순간 작업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에 밝은 눈과 함께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다. 글자 배열이 가지런해야 하고 한 자라도 잘못 새기면 판을 밀고 처음부터 다시 새겨야 한다.


윤도에는 동서남북 대신 震·兌·離·坎자가 새겨진다. 그 간방인 동남·남서·서북·북동이란 글자가 들어가는 지점에는 巽·坤·乾·艮이란 8괘 글자가 들어간다. 천간과 오행도 표기된다. 甲乙은 木이며 東에, 丙丁은 火로서 南에, 庚申은 金으로 西에, 壬癸는 水로서 北에 각각 배치된다. 방향 표기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土로서 戊己는 빠진다. 이렇게 윤도는 십이지와 팔괘로 방향을 표시하기 때문에 김 옹의 백부는 大學과 周易 등을 완독하는 공부를 중시해 시켰다고 한다. 24층 윤도의 경우 새겨지는 글자만 4천자에 이른다.

대추나무 원반에 한자 한자 새기는 땀과 혼의 결정체
윤도를 9층까지 파는 데는 열흘 가량 걸리고 22층까지는 넉 달 이상 소요된다고 한다. 각자가 끝나면 먹으로 표면 전체를 검게 칠해 동심원의 모양을 살리고 흰 옥돌가루를 칠해 글자가 선명히 드러나도록 한다. 사방위에 해당하는 글자에 붉은색 주사를 입히고 자침을 만들어 얹는다. 정교한 바늘을 만들기 위해 강철을 깎아 숯불로 단련한 뒤 초침처럼 가늘어지게 두드린다. 이 바늘을 김 옹은 300년 동안 가보로 전해져 내려오는 천연 자철석 위에 세 시간 가량 올려놓는다. 자철석으로부터 강한 자성을 옮겨 받은 바늘을 구리와 주석을 합금해 만든 뾰족한 신주 위에 얹으면 정확히 남북을 가리킨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윤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 옹이 윤도 작업을 하는 데 쓰는 도구, 이를테면 자철석을 비롯해 걸음새, 돌되송곳, 바늘집게, 정, 활비비, 돌음쇠, 조각칼, 정간대 등 30여 종류의 도구는 모두 백부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다.


“자철석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곳에 자력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해서 보관해야 하고 도구들은 잘 길들여서 쓰면서 쇠가 무뎌지면 바꿔서 쓰고 있습니다. 자철석을 비롯해서 백부님이 쓰시던 이 낡은 도구들도 내게는 스승이요 친구 같은 것이지요.”


이렇게 정성들여 만든 윤도는 예전엔 수요가 많았다. 김 옹이 어렸을 적에는 물론 그랬고, 그가 윤도 일을 시작한 1960년대까지도 그랬다. 당시 지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멋을 위해, 또는 명품에 대한 기대감으로 윤도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 시절 백부의 사랑방에는 윤도를 사 가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는 것이다.


“일주일 씩 백부님 사랑방에서 숙식하며 기다려서 윤도를 사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윤도를 두세 개 팔면 땅 한 마지기는 살 수 있었으니 백부댁은 큰 부자가 됐지요.”
그러나 1970년대를 기점으로 그 수요가 줄기 시작했다고 한다. 경제 근대화 과정에서 풍수를 미신으로 여기는 사회현상의 탓도 작용했다. 특히 윤도를 이용한 풍수 이기론이 형기론과 물형론에 밀리면서 지관들마저 외면하는 현상도 일정부분 수요 감소에 작용한 측면이 있다. 김 옹은 점차 우리 실생활에서 멀어지고 있는 윤도의 사양화를 안타까워한다. 무엇보다 윤도가 사라지면 윤도 사상이 사라질 것에 대한 우려다.

인간의 길 담겨있는 ‘윤도 사상’ 후대로 이어져야
“윤도는 지금의 최첨단기기보다 더 넓고 깊은 세계를 우리에게 전해주지요. 하늘과 자연, 물의 흐름과 땅속의 내용까지 관찰하고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지 목적지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자연 속에서 인간이 가야할 길도 가르쳐주고 있지요.”
그래서일까, 김 옹은 자신의 반세기 윤도 인생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윤도로만 살림살이 하기는 참 팍팍했습니다. 그래도 이 길을 걸어오길 참 잘했구나 싶어요. 윤도는 바르게 가는 것이고, 어디에 갖다 놔도 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한 평생 부자는 아니었지만 바르게 살려고 노력해 왔지요. 윤도가 내 삶의 나침반으로 말없이 가르쳐 준 교훈입니다.”


김 옹은 이즈음 1년에 윤도를 한 스무 개 정도 만든다. 패철(평철), 선추, 면경철, 거북이패철 등 규모가 작은 네 가지 윤도를 주로 만들지만, 스케일이 큰 것도 함께 만들고 있다. 이 가운데 팔리는 것은 10여개 정도라고 한다. 그것도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몇몇 늙은 지관이 선물용으로 사거나 소장품으로서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사가는 정도라고 한다. 김 옹이 만든, 뚜껑에 화려한 용무늬가 새겨진 24층짜리 윤도는 하나에 1천800만원까지 나가는 고가의 것으로, 지금까지 세 개를 팔았다고 한다.


현재 김 옹은 자신의 윤도 일을 아들인 김희수(53)로 하여금 잇게 하고 있다. 김 옹은 중요무형문화재이니만큼 후계자를 길러야 하는 의무가 따르지만 이로부터의 부담감은 우선 덜게 됐다. 김희수도 아버지처럼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서 20년 동안 근무하다가 가업을 잇겠다는 사명감으로 후계자가 됐다. 김희수의 아들도 윤도 제작 장학생이니, 우리 전통 윤도의 맥은 적어도 한 세기 정도는 끄떡없이 이어질 것 같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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