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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견인한 중화학단지의 두 얼굴
근대화 견인한 중화학단지의 두 얼굴
  • 손은하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 승인 2013.12.30 1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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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36_ 울산공단


▲ 울산석유화학단지의 밤은 사진처럼 황홀하게 빛난다. 이 황홀함은 성장을 향한 것인 동시에, 황홀함의 그늘까지 암시한다. 사진제공 박종영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울산은 1962년 제1차 국가경제개발계획에 의해 ‘특정공업지구’로 선정됐다. 대규모의 공단으로 인해 국가는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뤄냈으나, 그 자랑스러운 성장 이면에는 현장 근로자들의 삶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공장의 굴뚝 연기 속에 소리 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특정공업지구에 선정된 기념으로 시내 중심에 공업탑을 우뚝 세우고 그 비문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글을 새겨놓았다. “(…)제2차 산업의 우렁찬 수레소리가 동해를 진동하고 산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엔 국가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이에 도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검은 연기가 대기에 뻗어가야 나라의 발전이 있다고 피력했던 그 시절을 지나 이제는 태화강 십리 대밭길과 연어 회기로 표상되는 에코폴리스(ecopolis)를 지향하며 오히려 이 검은 연기를 빠르게 지워나가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늦은 밤, 공업탑에서 진하해수욕장 쪽으로 가다보면 온산공단의 야경이 너무나 눈부시게 나타난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화려한 광경은 그곳에서 내뿜는 연기와 악취마저도 잠시 잊게 하는 마력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울산은 1960년대에 공업지구가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1930년대에 이미 일본이 대륙 진출에 대한 야심찬 계획을 갖고 ‘조선공업화 정책’과 ‘대륙 병참기지화 정책’을 펼치면서 공업지대로 계획했던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교통과 기후, 공업용수가 풍부한 점이나 수심과 노동력 등을 고려해 봤을 때 공업지대로서 입지가 가장 좋은 곳이 바로 울산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특정공업도시로 지정되기 전만해도 인구 21만명의 조그만 도시에 불과했다. 공업탑의 기둥을 5개로 만든 상징적인 의미 가운데 하나가 ‘50년 안에 인구 50만 되기’였음을 볼 때, 지금과는 그 규모가 엄청난 차이가 났음을 알 수 있다.


단일 업종의 공업단지로 구성된 대개의 공업도시와는 달리, 다양한 업종의 중공업단지가 조성됐다. 1968년 3월 남구에 울산석유화학공단이 건설됐고, 1975년 10월부터 울주군과 서생면 일대에 온산석유화학공단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현대 일색인 북구 일부와 동구 지역은 1970년대 중반 자동차산업단지와 조선소 등이 들어섰다. 이곳은 울산 안에서도 ‘현대시’라고 불릴 만큼 현대계열 종사자들이 대거 살고 있고,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다. 이처럼 대규모의 산업단지는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들어온 젊은이들로 북적이게 해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철저하게 국가 주도로 형성된 울산 공업지구는 외화벌이의 수단이 됐고, 이 지역은 국내에서 1인당 소득이 가장 많은 곳으로 기록됐다. 1960~70년대에 이룬 굴뚝산업의 성장은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그 옛날 대한민국의 설움과 맞바꾼 달콤한 연기였던 것이다.


“누가 우리를 메말랐다 하는가/ 누가 우리를 증오로 뭉쳐졌다 하는가/ 만약 우리가 메말라 있었다면 그 이유는/ 너희들이 우리를 착취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업을 통해서 인간을 얻었다/ 아 살아 있는 시간을 얻었다.”(백무산의 「동지의 눈물」 중에서)


울산은 국내 최대의 공단답게 많은 수의 생산 노동자가 존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는 대규모의 노동문제 또한 안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1974년 울산현대조선소 노동운동을 비롯해 1980년 대우자동차 파업 등을 거쳐, 1987년에는 그동안 눌러왔던 분노와 투지가 마침내 끓어올라 전국 곳곳에서 ‘노동 대투쟁’이 일어났다.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과 군대식 통제를 견디며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뤘으나,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전국 규모의 대투쟁이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이다. ‘내가 죽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는 현대 회장의 말을 보기 좋게 반박하듯, 진정을 시키러 나온 회장의 눈에 흙더미를 던지기 시작하며 그동안의 울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울산현대엔진이 물꼬를 트자 맹렬한 기세로 순식간에 현대미포조선,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가 이어서 민주노조를 결성했다. 그동안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수도권 지역이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울산에서 중장비를 동원한 노동자의 거리행진은 규모부터가 달랐고, 다른 지역 노동자에 많은 영향을 줬다. 울산 노동자들이 새로운 민주노조 운동의 주체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울산이 노동운동의 메카로 자리 잡은 것과 동시에 서서히 분열이 시작된다. 대기업의 교묘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로 노동운동은 분열되고 변절하고 말았다. 대기업의 정치·경제적 영향력 아래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그들의 진보적 정치색 또한 약화돼 버렸다. 노동자층을 대변하며 앞장섰던 사람들은 어느새 기득권에 포섭돼 희미하게 사라져 버렸다. 일명 현대공화국이 가진, 작은 한숨소리마저도 모조리 흡수해 버리는, 자본의 힘은 실로 놀라울 뿐이다.


울산은 도시의 기반이 채 갖춰지지 않은 채 서둘러 공단 및 시설들이 들어서게 돼 성장과 더불어 ‘공해도시’라는 낙인도 함께 찍혔다. 이를 극복하고자 울산·미포·온산 국가산업단지를 1986년 대기특별 대책지역으로 지정해 환경오염관리에 뛰어들었다. 2004년 5월에는 인간, 환경과 산업이 공존·상생하는 생태도시 건설을 목표로 한 ‘에코폴리스 울산계획’을 수립했다. 태화강 살리기 운동을 시작으로 그 주변을 생태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들이 시행되기 시작했다. 또한 (주)SK에서는 대규모 수영장과 테마파크, 야외공연장, 다목적구장 등을 갖추고 있는 생태형 도심공원인 울산 대공원을 기증했다. 공유지며 공공 공간의 기능을 가진 공원을 사적인 기업체에서 제공했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검은 연기가 생태공원을 통해 얼마만큼 정화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친환경 공간을 시민들에게 무료로 선사하며 만든 이미지 메이킹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하다.


또한 고래잡이 금지로 쇠락하게 된 장생포에서는 2005년부터 고래와 관련한 문화특구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공단 조성으로 인해 철거된 주민들로 형성된 신화마을을 문화와 예술마을로 탈바꿈하는 작업 등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문화 콘텐츠 발굴로 공해도시 울산을 새로운 이미지로 거듭나게 하는 작업이 분주하다. 그렇지만 공단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면 매캐한 냄새로 인해 창문을 급히 닫아야 했던 기억이 선명히 남아있는 이곳을, 공단 저 너머에 있는 아련한 역사의 기억을 끄집어내 서둘러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여전히 불안하게만 보인다.



손은하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필자는 부산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상공학을 전공했으며, 대표 논문에는 「부산 원도심의 역사와 문화 색채 이미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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