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8 11:30 (목)
이집트 문명의 꽃,헬레니즘과 이슬람 문화를 피우다
이집트 문명의 꽃,헬레니즘과 이슬람 문화를 피우다
  • 최재훈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초빙연구원
  • 승인 2014.01.02 18: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중해이야기 8_ 문명교류의 첨단, 알렉산드리아


▲ 카이트 베이 요새 사진 최재훈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초빙연구원

동부 지중해에 위치한 항구라는 교통의 이점과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는 알렉산드리아를 지중해 교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알렉산더의 이름을 딴 여러 ‘알렉산드리아’ 중 이집트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가 아직까지 남아있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이다”라고 말했다. 나일 강의 범람과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이집트의 문명이 이룩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가 위치한 나일 삼각주상의 하 이집트(Lower Egypt)는 나일 강 상류에 위치한 상 이집트(Upper Egypt)에 비해 비옥한 토양으로 농사가 수월한 곡창지대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수도인 카이로에서 북으로 약 180Km 정도 떨어진 이집트 제 2의 도시이며 지중해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지중해성 기후로 휴양지, 관광지로 유명하고 해안에는 유럽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정복왕의 이름으로 문명의 융합을 이루다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명은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에서 나왔다. 알렉산더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은 기원전 334년 동방원정을 시작한다. 알렉산더는 정복한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여러 도시들을 형성했는데, 가장 유명한 도시가 현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다. 알렉산드리아는 현지어로 알 이스칸다리야( , al-iskandar­lyah)이며 흔히 알렉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알렉산드리아는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통치하는 이집트의 수도가 돼 헬레니즘 시대의 문화·경제의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헬레니즘 문명은 정복에 의한 문명 융합의 결과로 그리스 문화와 동방의 여러 문화가 서로 어우러져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형성한 사례이다.


전쟁이나 정복에 의한 문명의 충돌 또는 교류현상은 교역 등에 의한 문화교류보다 그 임팩트가 강하고 결합도가 높다. 우리가 사는 현대에 비해 교통기반이 열악해 소통의 기회가 적었던 당시에는 전쟁과 정복을 통한 이민족과 이문화의 교류가 가장 임팩트가 큰 소통의 기회였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이러한 소통의 결과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 만들어진 파로스 등대는 지중해를 오가는 문화의 교류를 밝히는 빛이 되었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수많은 석학과 예술가를 유입해 학술 및 예술, 과학, 문학 발전을 융성하게 했다. 현재 등대와 도서관은 유실됐으나 그 자리에는 알렉산드리아 항을 지키는 카이트 베이 요새와 현대식으로 신축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그 명성을 지키고 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는 무역항으로서도 번영하게 됐다. 인도·아라비아·아프리카의 산물과 이집트의 국내산물을 비롯해 각종 문화코드를 지중해를 통해 각지에 보내는 문화 수출항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로마제국은 카르타고를 꺾고 서부 지중해의 패권을 잡게 되자 동부지중해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가 이집트로 진출하는 통로가 됐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만나러 발을 디딘 곳이 알렉산드리아 항구였다. 이후 로마제국의 문화와 이집트 문화가 교류해 새로운 문화가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새롭게 탄생하게 됐다.

알렉산드리아에는 기독교가 공인 받기 전 기독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은거하던 카타콤 베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기원후 1~2 세기경 만들어진 지하 분묘는 로마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지하 3층까지 남아있다.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면 예배당, 석관이 놓인 무덤 등이 보존돼 새로운 종교문화가 탄생하던 당시의 환경을 보여 주고 있다. 7세기 이후 알렉산드리아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흥한 이슬람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된다. 이집트의 고유문화 토양 위에 헬레니즘 로마 문명과 접목돼 새로운 문화를 일궈낸 알렉산드리아는 이슬람이라는 종교문화를 받아들여 또 다른 문화 트렌드를 창출하게 된다.


16세기 이후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거쳐 18세기 나폴레옹의 이집트 진출, 영국의 식민지 진출의 교두보가 된 곳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였다. 알렉산드리아는 또다시 문명의 용광로가 됐다. 유럽의 근대사상과 문물이 이곳을 통해 이집트에 진출하게 됐고, 이집트 지식인들의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켰다. 이 시기 알렉산드리아는 유럽의 영향으로 근대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유럽식 도시계획이 이뤄져 유럽풍 건물이 들어서게 됐으며 항구도 확충됐다.


물자와 인력의 교류가 다량으로 빈번하게 이루어진 결과, 이집트는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개혁주의자들과 전통주의자 간의 갈등을 겪게 된다. 이러한 문화적 혼란기속에서 유럽식 근대 군사교육을 받은 나세르는 유럽식 근대국가의 개념을 받아들여 혁명을 일으켰다. 나세르의 혁명은 이집트 역사상 최초로 국가의 권력을 왕조에서 평민에게 돌려놓은 전환점이었다. 이후 이집트는 근대국가의 기틀을 가지고 세계무대에 동참하게 됐다.

문명교류의 교두보
지중해를 둘러싼 여러 현대식 항구들의 개발과 항공교통의 발전으로 알렉산드리아는 항구로서의 중요성은 점차 잃게 됐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물류의 중심이 포트사이드(Port Said)로 옮겨 가게 됐다. 하지만 이집트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포트사이드보다 알렉산드리아를 더 선호한다. 지중해 크루즈도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정박해 폼페이우스의 기둥, 카타콤 베, 몬타자 궁전 등지에 관광객을 내려놓는다. 알렉산드리아가 지닌 여러 가지 문화 콘텐츠들이 그 이유일 것이다.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의 인적 교류가 시작된다. 물건 흥정과 볼거리, 먹거리에 대한 거래와 각종 정보 교환이 이뤄진다. 전쟁과 같은 다이나믹스를 가진 교류는 아닐 지라도 이러한 소소한 교류활동은 이천년 전, 지중해를 둘러싼 이민족, 이문화 간의 교류와 대동소이할 것이다. 서로 간 소통할 수 있는 공용어와 지불 수단 등은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그리 길지 않은 교류를 통해 상호간의 이질감을 떠나 서로를 이해하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먼 조상들이 그리 해왔듯이…… 만남이 반복될수록 그들은 익숙해 질 것이다. 만남을 통해 새로운 유행이 생겨날 것이고 이는 각자의 고향으로 전파될 것이다. 이러한 만남을 위한 편리한 제도와 문화 역시 생겨날 것이다. 이곳의 역사가 그래 왔듯이…….


동부 지중해에 위치한 항구라는 교통의 이점과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의 지정학적 위치는 오랜 기간 알렉산드리아를 지중해 교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알렉산더의 이름을 딴 여러 ‘알렉산드리아’ 중 이집트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가 아직까지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최재훈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초빙연구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