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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모래밭에서 일군 ‘성공신화’의 明暗
황무지 모래밭에서 일군 ‘성공신화’의 明暗
  • 박규택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4.01.14 1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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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37_ 포항제철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 1기 착공버튼을 누르는 이 순간은 포항제철의 역사의 얼굴인 동시에, 한국 근대화의 명운을 가른 순간이기도 하다. 사진제공 포스코 커뮤니케이션실

‘浦項浦鐵’(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현재 포스코)은 1973년 7월 3월에 제철소 1기가 준공됨에 따라 한국 제철업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중화학공업의 육성을 목표로 한 일련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실행을 위한 초석을 놓았다.

1960년대 중반이후 박정희 정부는 자동차, 조선, 기계 등의 중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철강의 대규모 국내생산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해 다양한 노력들, 즉 철강공업종합육성계획 확정(1964년 12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ions, KISA) 구성(1967년 3월),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설립(1968년 4월),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한일간 기본협약 체결(1969년 12월), 철강공업육성법 제정(1970년 1월) 등을 추진한 결실로 포항제철이 탄생하게 됐다. 이후 포항제철은 정부의 지원, 박태준의 추진력, 노동자의 勞苦를 바탕으로 성장을 거듭해 제철소 4기가 완공된 1981년 2월 연간 850만톤의 철강을 생산하게 됐다. 국가 소유의 주식회사(재무부, 56.25%와 대한중석 43.75%)로 출발한 포항제철은 2000년 완전한 민영기업으로 전환됐고, 2002년 포스코(POSCO)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냉전체제와 세계철강업의 구조 변동
포항제철의 건설과 발전은 美蘇의 냉전체제 구축과 일본 철강업의 성장과 대외 진출의 거시적 구조와 맞물려 이뤄졌다. 미국은 終戰 후 냉전체제 구축을 위해 적대국이었던 일본의 파괴된 경제를 재건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더욱이 일본은 6·25전쟁 동안 군수물자 공급을 통해 국가경제를 빠르게 회생ㆍ발전시킬 수 있었다. 1973년 포항제철이 세계제철업계에 얼굴을 보이는 시점에 일본은 이미 미국, 소련 다음으로 철강을 많이 생산(연간 1억1천만932만2천톤)하는 국가 강국이었다.

당시 미국은 제선ㆍ제강ㆍ압연의 세 공정을 연결시킨 일관제철소와 규모의 경제에 토대한 대량생산체제를 수립해 세계 철강업을 지배하고 있었다.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었던 일본은 1950년대 일련의 철강업 합리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미국의 철강생산 양식을 수용해 생산량을 급속히 증가시켰고, 또한 생산 기술과 관리 방식 등을 발전시킨 결과로 1980년대 초반 미국의 철강생산량을 추월하기도 했다.

세계철강업의 변방에 위치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일관제철소 건설과 운영을 위한 자금과 기술을 지원받아 포항제철소를 준공했다. 이후 제철 선진국들의 기술을 배우고 나아가 기술 혁신을 통해 철강업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한국의 철강생산 규모는 1988년에 영국을 추월했고, 2002년에는 세계 5위로 도약하는 정도로 성장했다.

포항제철소가 설립된 장소는 ‘사막과 같은 모래밭’ 혹은 ‘황량한 벌판’으로 흔히 표현되고 있지만 실제로 농업과 어업을 생업으로 삼아 주민들이 대대로 살아왔던 삶의 터전이었다. 강과 바다가 맞물리면서 만들어진 생태계 속에서 다양한 생명체가 활동하는 곳이었다. 즉, 포항제철소 건설은 삶과 자연의 역동성이 펼쳐지는 구체적 장소를 국가의 개발계획과 (국영)기업의 이윤 추구(혹은 부의 축적)를 위해 추상적·합리적 공간으로 변모시킨 사건이었던 것이다.


거대한 제선·제강·압연 공장과 부대시설로 구성된 포항제철소는 결과적으로 다양한 환경을 파괴하고 말았다. 형산강의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넓은 평야, 형산강의 강물과 영일만의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가는 장소, 충적평야를 개간해 만든 논과 밭에서의 농사와 영일만에서의 고기잡이로 살아온 주민 삶의 터전, 그리고 아름다운 해안 경관과 긴 백사장 등이 그렇게 해서 사라지고 말았다.
정부는 바로 이곳에 포항철강공업단지(1967년 7월 20일 건설부 고시)를 조성한 뒤 10개의 거대한 공장과 12개의 부속건물을 2년 3개월(1971.4.1~ 1973.7.3)에 걸쳐 건설해 포항제철소 1기를 완공시켰고, 이후 1981년 2월까지 2기, 3기, 4기 제철소를 건설해 규모를 확대시켰다.

사라진 지역민의 삶터, 만들어진 기적
이에 따라 포항제철소 주변의 생태계가 파괴됐을 뿐만 아니라 해양과 대기마저 오염됐다. 그리고 높은 공장 건물, 넓은 도로, 소음을 내면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대형 차량 등으로 인해 전통적 농어촌 경관은 대규모 근대 공업단지의 경관 혹은 추상적·계획적 공간으로 완전히 변모됐다. 제철소 조성 시기에 이뤄진 한 연구에 의하면, 부지로 편입된 大松面의 일부 6개동에 속한 1천147가구(6천745명)는 특별한 생계와 주거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낯선 곳으로 이주해야 했다.


종합제철소의 포항 입지는 포항의 사회·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종합제철소를 중심으로 이와 관련된 업체들이 증가하면서 포항은 항구·군사 도시에서 철강 도시로 이미지를 탈바꿈했다. 또한 지역경제도 철강 산업에 편중하게 됐다. 포항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했으며, 경제 규모도 커지게 됐다. 제철산업의 발전은 영일만에 위치한 하나의 지방 도시인 포항을 국가, 기업(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세계철강업과 연계시켰다. 따라서 포항의 사회·경제는 한국경제의 구조와 정책 변화, 포항제철(포스코)의 이윤추구 전략, 세계철강업의 변화 등의 외부적 환경에 의해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받게 됐다.


1970~1980년대 한국경제가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운영될 때, 포항제철은 철강 생산을 지속적으로 증가시키면서 포항의 사회·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990년 이후 한국경제가 지식·정보·서비스업 중심으로 방향을 전환시키고, 포항제철도 국내 소비시장의 포화, 중국제철업의 급속한 부상에 따른 해외시장에서의 경쟁 심화 등으로 인해 해외 진출·사업 다각화 등의 전략을 추구함에 따라 포항의 사회·경제는 부정적 영향에 놓이게 됐다. 비슷한 사례는 1970년대 이후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이 탈산업화되는 과정에서 과거 중화학공업, 즉 철강·석탄·자동차·조선·석유 산업에 편중된 도시들의 쇠퇴 혹은 정체 현상이다. 포항제철의 ‘성공신화’와 ‘황무지, 모래밭 서사’는 넓고 긴 안목으로 그리고 명암이 교차하는 시각으로 볼 때,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박규택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
하와이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사회·경제지리학을 전공했다. 최근에는 다문화공간, 정치생태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논문으로 「관계적 공간에서 결혼 이주 여성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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